▶ 권두시

일상의 진공을 위한 기도
지도 목사 이민재

주님

당신은 혼자 계실 때 무얼 하셨습니까?

기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고독의 숲으로 들어가실 때 말고

살다가 이따금 생기는

멍한 시간들

예를 들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혼자임을 느낄 때, 아니면

주말에 모처럼 일찍 귀가했는데

식구들은 어딘가 외출하고 아무도 없을 때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없는 공간의 고요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잠시 당황할 때

또는 바쁘게 바쁘게 돌아가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할 일이 갑자기 없어지는

진공같은 순간이 생길 때

또는 실상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지무지하게 바쁜 줄 알고

사람들이 나를 가만 내버려둘 때

그럴 때 주님, 당신은 무얼 하셨습니까?

오로지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셨습니까?

다음에 할 일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짜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조용히 쉬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당신만이 알고 계시던 세속의 즐거움을 은밀하게 맛보고 계셨습니까?

그럴리야 없겠지요,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통 내어던지신 당신께서

그럴 수가 없으셨을 겁니다.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괜히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나의 모든 일상이 주님 또는 하늘 아버지와의 친교로

꽉 차지만은 않기 ?문입니다.

주님

무시해버려도 좋을 아주 사소한 순간들과

문득 주어지는 일상의 진공 속에서도

충만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은총을 떠올리며 음미하며

생명의 세계로 젖어들어가고 싶습니다.

나의 속된 관심으로 임해

나의 존재가 당신의 존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 금같은 일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소서

주님.
 
 

"주안에서 하나된 자들아 깨어일어나 빛을 발하라"
1989년도 대학부 주제 성구
 
 

▶ 序 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대학부장 강신태 장로

나는 山을 좋아한다. 산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산을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같은 산을 늘 바라보는것도 좋지만 같은 산을 자주 오르는 것은 더욱 좋다. 같은 산을 오르더라도 산을 오를라치면 오르는 계절과 오르는 시간, 오르는 코스에 따라 산이 주는 느낌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기분도 다르고 감동도 다르다. 내가 달라지기 때문에 산이 달라 보이는 것일까, 산이 달라지기 때문에 내 느낌이 달라지는 것일까. 같은 산, 같은 계절, 같은 시간일지라도 오르는데로 걷는데로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느끼는 것이 달라지고, 냄새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어느 시간이나, 어느 곳에서나 같은 경치, 같은 냄새, 같은 느낌은 아닌 것 같다. 하여튼 그 산은 늘 같은 산이 같은 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산을 오르는 나는 늘 다른 것을 보게 되고 다른 냄새를 맡게 되고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달라지는 것이 그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늘 당연한 것인 양 놀라지도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산에는 조그만 개울물이 흐른다. 그 개울물은 위에서 아래로 졸졸졸 흐른다.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물이 줄어들어 작은 개울이 되었다간 어디에선가, 어느때부터인가 개울물 소리는 멀어지고 그러다간 그 물소리마저 끊어지고 만다. 거기엔 이젠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남아 있다. 올 겨울엔 정말 겨울다운 겨울이 온 모양이다. 삼한 사온이 뚜렷하니깐. 그래서 산은, 개울은 더욱 그 달라지는 모습을 부지런히 한다. 나는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빠르게 할 수도 없고 풍성하게 할 수도 없으며 빈약하게 할 수도 없다. 얼마전 우리들은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여 이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은 역사 바로잡기의 물결에 휩싸여 역사 바로잡느라고 정신이 없다. 세계화는 천지간에 공간을 꿰뚫고 펼쳐 나가는 것이리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역사 바로 잡기는 시간을 꿰뚫고 역사를 흔드는 것이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산을 오르다가도 물길을 따라 오르다가도 주님을 뵈옵고 그 영광을 뵈옵고 그 섭리하심을 생각하고 느끼고 공간과 시간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심을 깨닫고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어서 그 산을 다시 올라 가고 싶다.

▶ 貞洞 一說

대학부실이 이렇듯 추운 것은…
지도 교사 양재형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는 하지만, 목요 집회의 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비단 목요 집회 뿐 아니라, 대학부의 모든 행사가 사뭇 조촐(?)해 지는 분위기다. 믿음직한 기독 청년들인 우리 대학부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졌을리는 없고, 아마 모두들 세상 속에 머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편을 택한 모양이다. 날씨 만큼이나 썰렁해진 목요일 저녁의 젠센홀에는, 그러나, 두 손 가득한 만큼의 따스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까지는.

모두에게서 대학부가 잊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부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누구나 서슴없이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더 좋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고, 임원들이 더 수고해야 하고,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얘기다.

언제라도 찾았을 때에는 그 안에 속함으로써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변함없는 공동체로 대학부가 남아 있어 주기를, 모두들 바라는 것이다. 너나 할 것없이 여러가지 일로 바쁘고 분주하여 매번 이 공동체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늘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이해할 만한 얘기다.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 세상인가. 이십대 초반 그 시절에는 얼마나 할 일도 볼 일도 많은가. 더우기 요즘같이 현기증나게 돌아가는 바쁜 세상에서임에랴.

그러나 이 모든 '좋은' 얘기들에 있어서 대학부는 '나'와 분리된 객체로 '저기에' 놓여 있다. '나'를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그저 거기 놓여 있으면 좋은 것이다. '나'도 따스함이 그리워지고 문득 보고 싶어 지는 얼굴들이 떠오를 때 가끔은 찾아 보는 '은혜'를 베풀 것이니‥‥ 이건 곤란하다. 자신을 진정으로 그 공동체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허하다. 때로 그 모임이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붐비고 활기띤 듯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참다운 생명력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딘가 멀리에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평생을 찾아 헤매일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를 그 나라의 일부로 믿고 그 나라의 삶의 양식에 따라 살아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루는 것이다. 정동 골목길의 그 정겨운 건물 속에 놓여 있는 썰렁한 대학부실이 대학부 공동체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대학부의 일부로 믿고 대학부를 책임지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때로는 사람들로 인하여 지치고 상처받기도 하나 하나님 나라의 작은 모형을 이곳에 일구어 내는 기쁨으로 그 수고를 기꺼워 하는 이들 속에, 대학부 공동체가 현존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바로 대학부 공동체인 것이다.

어쩌면 문제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본질을 우리 스스로가 잊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앙이란 우리가 품위있게 보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교양이 아니다. 심지어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개인의 품성을 가꾸는 자기 수양의 도구나, 사회 질서의 보전을 위한 도덕적 표준을 제공하는 체계도 아니다. 신앙에 대한 이같은 오해는, 우리가 늘 조롱과 비웃음을 퍼붓기를 마지 않는 행태, 즉 신앙을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마술적 도구 쯤으로 생각하는 행태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우리는 어쨌든 선하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란 말인가 - 살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앙의 진정한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앙이란 위에 언급된 모든 좋은 것들 이전에 '살아 계신 구세주'와의 만남이라는, 우리 전 존재를 뒤흔들 충격적 사건임을 애써 은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품위를 유지한 채 우리 식대로 살아가고자 한마디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냅둬유!"

어쩌면 문제는 우리가, 특히 나 자신부터도 그렇지만, 너무도 '예의바르고 교양있게' 믿으려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리는 '도깨비 방망이 예수'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이들을 통쾌히 조롱하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한 마디에 모든 고차원의 기도가 담겨져 있으니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해 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축복하실 '의무'를 가진 분이니 알아서 잘 해 주실 거니까 너무 자주 기도를 드려서 피곤하시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듯이. 혹은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 뜻보다 높으니 그것이 최선이고,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일 마음만 먹고 있으면 된다는 듯이. 그와 같이 '성숙한'(?), 즉 품위를 유지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우쭐해져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창백하고 조심스런 태도에는 모든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인 '갈증과 목마름'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전 존재를 걸고 매달리는 모험의 요소, 열망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없어도 무방하지만 있으면 품위 유지에 도움이 되는 장식물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이 그럴듯한 장식물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회적 체면과 품위를 모두 포기한 채, 악의에 찬 대중의 웃음거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는 행동을 하도록 삭개오를 몰아간 것은 분명코 어떤 간절한 '갈증과 목마름'이었다. 아마도 죄책감과 번민과 견딜 수 없는 고독과의 오랜 싸움이, 그런 모험적인 신앙의 행동 이전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삭개오가 우스꽝스런 모습을 연출하며 나무 위에서 나사렛 사람을 향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었을 때, 삭개오만 구원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삭개오가 구원자를 찾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가 그의 침실에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자신과의 싸움을 치르기 이전부터, 구원자는 이미 삭개오를 찾아 오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나사렛 사람은 나무 위의 그 볼품 없는 세리장이의 이름을 부르신다.

우리는 모두 신앙에 대해 이런저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채, 오해를 품은 채, 하나님께 나아간다. 혹은 돈을 위해서, 혹은 사업의 성공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혹은 병고침을 위해서, 혹은 혁명을 위해서, 혹은 사회 변혁을 위해서, 혹은 선한 스승을 찾아서, 혹은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어쨌든 모두들 한 켠에 지독한 오해 하나쯤 품은 채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오해를 먼저 지적하고 꾸짖으시지 않으신다. 늘 우리보다 먼저 우리에게로 오시는 하나님은, 만약 우리 안에 존재의 깊은 갈증과 목마름의 흐릿한 흔적이라도 있다면 기뻐 말씀하신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지금의 대학부를 위해 참으로 필요한 것은, 갈증과 목마름을 품은 채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몇 사람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바로 대학부 공동체임을 깨닫고,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몇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 몇 사람을 기다리며, 겨울 바람 부는 바깥보다 더 추운 대학부실을 예수는 오늘도 서성이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랑으로 행하며 강건하라"
1990년도 대학부 주제 성구
 
 
 
 

▶ 정동 문단

안녕, CA여!
지도 교사 이상봉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듯 내가 대학다닐때 마태복음 5:30의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는 말씀이 이상하게 사용되었다. 지금이야 戰鬪王씨가 반란수괴로 거의 낙인찍혀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한국의 가이사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당연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적절하게 실천되었고, 이는 조찬기도회라는 형식으로 가이사의 것을 확실하게 재해석했던 듯하다. 그러나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이야 별로 반신반의할 것도 없는 여러가지 비리나 숭악한 이야기들에 너무도 익숙해 있었고, 83년의 KAL기 격추와 같이 어딘지 수상쩍은 소문에 대해 여러가지 가설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지금은 실정법상 반란수괴지만 당시는 이성법(자연법)상 반란수괴가 얼굴마담으로 있는 군대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지려고 했다. 북한의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에 젖어 있던 학생 운동권의 한 분파가 주장한대로 한국 군대는 <양키의 용병>이라는 편리한 논리도 있었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모든 대학생이 골치 아프게 이것 저것 따지고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대에 가보았자 고생만하니 누구나 할 수만 있으면 빠지려던 차에 <식반론>은 아주 좋은 핑게거리에 불과했을런지 모른다. 식반론이라는 대의명분에 관심도 없으면서 순전히 자신만 고생을 면하자는 족속도 많았으니까.

손가락을 자른다든가 하는 것은 고전적인 병역 회피 방법이다. 독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자르고 신검을 받았더니 면제를 받긴 받았는데 그 사유가 평발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심심잖게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서는 살빼기나 살찌우기가 더 흔했다. 한 40kg 이내면 면제되었던 것 같다. 원래 밤새워 공부하고 토론하던 사람들이라 몇 개월 예정으로 다이어트 하면서 10kg 정도 감량하는 노력은, 게다가 그들중 서넛은 웬만한 박사 학위 이상이라 평가받는 학부 논문을 그 와중에 제출했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단절없이 공부하여 앞으로 잘만 하면 외국에 내놓을만한 몇 안되는 학자가 될 것 같다고 하니 말로만 세계화를 부르짖지 실제 세계화를 감당할 인재에게 병역 헤택 하나 제대로 주지 못하는 우리들의 못된 심보에 통쾌하게 항거하는 듯하여 새삼 인간사에 관련된 판단은 역시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을 찌우는 것은 어쩌면 빼기보다 더 처절하다. 닭고기, 콜라, 햄버거등 고칼로리 식품을 무조건 많이 먹고 수시로 잠자는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삶자체가 정말 짜증났다. <그냥 가고 말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참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 실족한 손을 잘라버리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났겠지. 너무 살이 쪄서 걸어다니지도 못하고(대략 키 165cm에 몸무게 110kg), 나중에는 피부가 터서 온갖 약을 발라야 하고, 수도 통합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을 때 몰래 화장실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

이 모든 것이 불순한 빨갱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의 기존 질서를 미우나 고우나 따라가려 했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물론 나도 군대가기 전에 독한 마음을 먹고 단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때가 57kg였으니까 한 20kg만 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장미빛 환상과 함께. 그러나 겨우 두끼 굶고 그만두었다. 내 18번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굶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내 발로 교육대에 입소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인에서 안락한 자유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 그때의 비참함! 그러나 온갖 명분과 자기 합리화끝에 얻은 훈련병의 자존심과 대화와 타협의 관용 정신은 입소하자마자 소위 <사회-군대는 사회가 아니니?>에서 배운 <싸제인간>의 물을 빼겠다는 내무반장과 숙달된 조교의 무차별 군화발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범케이스에 걸린 건달 출신의 동료 훈병이 무자비한 군화발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성경에 있는 어떤 표현보다 생생한 지옥의 모습을 추악한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를 전후하여 나는 여인네들이 능욕당했을 때 느끼는 수치와 공격적 태도를 무조건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 그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여!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내가 정의의 하나님이란 관념을 모르고 남들이 터지든 말든 나만 편하면 장땡이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으면 예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해도 가끔 우스꽝스럽고 불안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그 군화발에 짖이겨지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법, 정의, 인간, 하나님 등이 그 짧은 순간에 왜 그리 떠오르던지------. 철학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법적 정의는 당위일 뿐 사실 명제와는 존재론적 위치가 다르다는 것, 그리하여 정의, 진리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처럼 용어 자체가 공허한 당위일 뿐 결코 현실태는 될 수 없다는 학설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인간이 개처럼 맞아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찾는 것 외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사는 과연 발전하는 것인지? 지금의 상황은 이문열씨가 지적한 것처럼 분명 <또 다른 주인을 만나 짖어대는 똥개>가 판치는 모습이 다분하다. 논리의 일관성도 치밀함도 부족하여 이미 예상되었던 위헌시비에 쉽게 제동걸리는 허술함도 있다. 어쨌든 대체적으로 나쁜 짓을 했다고 평가받는 자들에 대해 나중에라도 처벌한다는 의도 자체는 누가 뭐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무엇인가 무서운 일이 있어야 겸손해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특별법의 대체적 합의 사항인 <헌정의 중단을 초래하는 어떤 시도도 역사 바로 세우기에 위반된다>나 특별법 자체가 일종의 자연법 조항인 형벌 불소급 원칙에 위배된다는 법원의 위헌 제청을 보면서, 가장 낮은 자의 위치에서-중산층조차 타도대상으로 보았다-비타협적으로 투쟁한다던 그네들 제헌의회파(CA)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어인 영문인지? 우리의 헌법은 애초부터 친일파와 그에 관련된 불철저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급조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헌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는 그네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니 툭하면 분신하고, CA를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했던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론(NLPDR)의 궁극적 문제도 결국 헌법이었다. 12.12 이전의 헌법은 정의였던가? 5.16 이전의 자유당 헌법은 온갖 고난을 받고도 지켜내야 할 역사적 척도인가? 이제 역사 바로세우기를 거쳐 살아남은 헌법은 정의인가?

여러가지 우여곡절끝에 더욱 강화되는 헌법의 그 높은 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나 자신 이러한 흐름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면서도 일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사고방식과 생활 형태가 헌법으로 제도화될 가능성은 갈수록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CA를 위해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이 덧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야기했던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세상 자유는 이제 거의 물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화려했던 87년 6월, 진리는 없고 기껏해야 우리가 어렴풋이 접근할 수 있는 진리는 많은 사람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진리합의설>에 힘을 실어 주었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뒤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CA를 조용히 토론했던 모습만은 생생하다. 아니 그런 모습이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2500년 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다름아니다>라는 논변을 아주 치밀하게 폈던 트라시마코스의 목소리, 그리고 도대체 정의라는 말 자체의 공허성을 설파했던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반추하면 고대 폴리스 사회나 오늘이나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는 별 차이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때는 그토록 진지했건만 이제 CA에 대한 망각은 갈수록 가속화될 것이다. 그것이 발전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만은 살릴 필요가 있을 것같다. 정의, 하나님 나라가 이제껏 한번도 실현되지 않았고, 생각하는 사람마다 계급적, 사회 문화적, 종교적 입장차이에 따라 상이하기에 마치 무지개를 붸는 어리석은 멍청이같다해도 나는 영원히 찾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이상을 우리의 헌법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고 싶다. 진정으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 다른 어떤 명분과 이익보다 우선시되는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믿고 싶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한다.

잘가라 CA!
 
 
 
 
 

▶ 聖書 講解

마태복음의 이해
지도 교사 이경민

병자년 새해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참으로 유익한 책을 권해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므로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죽하면 또 성서를 읽자고 권하겠습니까. 정말로 성서는 잘 알고있어야 합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은 바른 길이므로 결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나서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을 저는 예언합니다. 일단, 성서를 읽기로 결심한 회원이 있다면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성서의 이해에 대한 소개를 하려합니다. 성서를 무작정 있기보다는 전이해로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알고 읽게 되면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새해인 만큼,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마태복음에 대한 전이해를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해주세요.

신약성서의 첫번째 책은 마태복음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마태복음이 교회가 사용하는 모든 문서들 중에서 가장 유용하다는 이유로 성서를 정경화시킬 때 마태복음의 차례를 첫번째로 두었다고 한다. 마태복음은 조직화되어가는 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기록되었다. 마태복음은 교회가 존속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의 처리를 위한 분명한 방향을 제공했으며, 이세상에서 교회가 계속해서 존속해야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회람되었던 문서를 예수의 제자이며 역사적 예수의 목격자인 마태가 썼다고 주장하는것 뿐이다. 당시, 중요한 문서는 권위있는 인물의 저작만을 인정해주던 시기였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이 문서를 복음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당시 존경하던 마태란 인물의 저작인 것처럼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때부터 이 복음서는 마태복음이란 복음서로 명명되어진다. 많은 신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신약성서의 마가복음을 기초로 하여, 예수의 어록집 (일명:Q자료)과 마태만이 갖고 있던 특수자료들을 가지고 마태복음을 썼다고들 주장한다.

마태복음이 쓰여지게 된 시기는 주후 70년경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후, 민심이 흉흉하던 상황이었다. 기독인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억울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종말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복음 저자는 기독인이 자의식을 갖을 교회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기독교는 모체인 유다교와 결별하기 전이므로 유다교와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옛 계시의 완성이며 새로운 계시인 예수를 알리려고 하였다.

마태복음의 중요한 강조점은 예수가 구약성서(유다교)의 성취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토라(율법)를 완성한 것이고, 예수 생애의 사건들은 구약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태복음은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한다. 이것은 토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안에서 토라와 예언서가 성취되었다는 강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복음의 전체적 구조는 토라의 구조와 같다. 마태복음의 문맥구조에서 핵심되는 것은 5종류의 설교군이다. 마태복음안에는 산상설교(5:1-7:27), 선교설교(10:5-42), 비유설교(13:1-52), 그리스도교 공동체 규칙(18:1-35), 묵시적 설교(24:3-25:46)가 들어있다. 이 5종류의 설교군은 토라의 다섯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염두에 두고 만든 구조이다. 이렇게 예수를 새로운 토라로 생각하는 마태복음의 저자는 구약의 모세를 모델로 하여 예수행적을 적어내려 간다. 예로써, 예수의 40일 금식기도는 모세의 40일 시내산 기도를 모델로 하여 기록한 것이다. 사실 예수의 금식기도 기일이 40일이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이런 작업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옛 토라의 완성이고 새로운 토라인 예수를 소개하기 위한 의도이다.

마태복음이 관심을 갖고 있는 바는 예수 재림의 지연에 따른 교회의 필요성이다. 종전에는 기독인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재림만을 기다렸으나, 이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춘 교회 공동체의 필요성과 교회의 사역과 증언의 역할이 중요함이 두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복음서중에서 교회라는 희랍어 단어 ekklesia를 사용한 유일한 기자라는 점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마16:18과 마18:17 두 곳에서 나온다. 특히 마16:18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 라는 고백뒤에 예수가 하신 말씀이다. "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는 내용에서 교회란 단어가 쓰였다. 하지만 같은 베드로의 고백의 내용을 다룬 마가복음 8:27-9:1에서는 교회의 터로서 베드로를 임명한 이 구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 저자가 의도적으로 교회의 역할과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삽입한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넓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계시의 해석, 즉 유다교에서 말하는 토라의 완성이 예수라는 점을 체계화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는 다른 입장이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자기 책을 '복음' (막1:1)이라고 부르면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관심을 둔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한 책' (마1:1) 이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마태는 복음선포에 대한 관심보다 새로운 계시로서의 예수에 대한 해석을 중시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절정은 지상명령 장면이다. 즉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28:19)고 명령한 구절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교회 생활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가르침"이고, 내용은 예수에 관한 권위있는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은 최종적 보증으로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현존하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결국 복음서는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준 약속으로 끝난다. :

' 그리고 보라. 내개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28:20)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딤후1:14)
1991년도 대학부 주제 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