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Ⅰ : 정동대학부 20年

貞洞大學部 20年史
편 집 부

1. 序 論

여러분은 우리 대학부에 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세상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듯 대학부도 오랜 교회의 역사와 함께 그 과거를 갖고 있으며 그 과거는 비록 그것이 어떠했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크나큰 힘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수 많은 가치관들, 그것은 시대와 공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며 대학부도 또한 예외일수는 없어서 과거에 우리 대학부를 거쳐가신 많은 선배님들도 그 당시의 상황하에서 대학인으로서 또한 기독인으로서 이상과 현실에 대한 많은 고민을 느꼈을 것이며 나름대로의 해결책과 가치관을 대학부의 한 형제 자매들과 공유하고 토론하며 대학 생활 더 나아가 일생의 큰 중심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또한 기독인으로서의 자신을 성찰하고 또 사랑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장으로서 대학부를 선택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대학부는 대학인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주로 이끌게 되는 여느 부서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독립성이 주어졌고 또 그만큼 많은 활동을 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말입니다. 비록 이 모든 것의 흔적이 지금 대학부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있지만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캐비넷속에 있는 많은 과거의 자료들(사진과 세미나 자료, 보고서, 십자가)들을 얼마나 자주 우리가 들춰보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거의 무심히 지나치는 과거의 흔적들, 비록 과거를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되돌아봄이 저희의 지금의 편견이나 사고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바른 길을 찾는 데 어느정도 도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앎은 저희 대학부에 대한 소중한 사랑도 일깨워주리라 생각됩니다.

이글은 꽤 길어질 것 같습니다. 또한 그런 글을 만들고 싶습니다. 1976년 2월에 시작된 대학생회(대학부의 정식 명칭)의 20년 역사를 밟아 간다는 것은 그곳이 담긴 교회와 사회의 흔적을 쫓는 것이며 질곡진 현대사의 비운 속에서 당시의 젊은이들이 가졌던 신앙과 사회의식의 흐름을 짚어나간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그 모든 것을 알수도 느낄수도 없음을 알지만, 긴 역사속에서 퇴색된 우리의 사고를 느끼며 변화된 사유와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새로움을 향한 노력과 20년의 깊은 의미를 되짚기 위해 이글을 써나가려 합니다. 사실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함이 준비를 하면 할수록 느껴졌고 더욱 많은 관심과 일손과 신념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지만 본 작업이 그러한 목표를 향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라 여기며 나름대로의 貞洞敎會大學生會史를 써나가려 합니다. 서류상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끼지만 최대한 대학부의 변화되는 모습을 반영하고 싶고 형식상의 문제(이것은 정리의 차원이 강하지만 역사를 이루는 일부라 생각됩니다)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여기의 글은 과거 십자가에서 모든 자료를 찾아 인용한 것이며 인용부분을 특별히 명기하지 않았으며 부분부분 개작하였음을 밝힙니다. 이해의 편의와 정리를 목적으로 매해의 십자가 발행호수 및 간단한 특징을 표로 정리하였고 이것이 대학부사를 쓰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부의 회칙에 나온 정식 명칭은 대학생회이며 매년 열리는 총회를 통해 우리는 이것을 확인해 왔습니다. 명칭상의 혼란을 야기할 상황에서는 대학생회라는 명칭을 사용토록 하겠습니다. 또한 글의 전개가 다소 산만하더라도 중간중간 대학부의 분위기 및 흐름을 느낄수 있는 글을 삽입할 것이며 그것은 글자체를 달리하여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2. 本 論

2.1 대학부의 태동

현 정동제일교회 대학생회의 시작은 멀리는 1897년 존스목사에 의하여 설립된 엡워드 청년회(교회의 엡뚨홀을 생각해보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청년회 활동이다. 그러나 이 청년활동은 일제치하에서의 애국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해산되었고 서울을 빼앗긴 동란을 겪으면서 수차례 이와같은 변란의 중단을 맞이하였다. 때문에 정동교회 청년회 활동의 조직과 성격 그리고 명칭 등의 변동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랜 사실의 기록은 지면상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후에 전문적으로 누군가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대학생회라는 이름이 성립되는 1975年 전후로부터 1980년까지만 먼저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1980년에 청년부와 대학생회라는 두 조직의 정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연도
호수
담임목사 
지도목사 
대학부장
지도교수
1
76
부재
은준관
강 천
2
77
부재
은준관
강 천
3
78
24 - 36호
은준관
김선재교수님
민영진
4
79
37 - 55호
은준관
김선재교수님
민영진
5
80
56-67호
이재은
이재준/구덕관/정하봉
김성재/유연주/유연숙
6
81
68-75호
이재은
정하봉
유연숙
7
82
76-80호
이재은
정하봉
유연숙
8
83
81-86호
이재은
정하봉/이선균
유연숙/전희영
9
84
87-91호
이재은
이선균
전희영
10
85
92-96호
이재은
이선균
전희영
11
86
97-101호
이재은
이선균
전희영
12
87
102-105호
이재은
이선균
전희영
13
88
106-110호
김봉록
이선균
전희영
14
89
111-113호
김봉록
이선균
이시영
15
90
114-117호
김봉록
이민재
이시영/윤정희
16
91
118-119호
김봉록
이민재
김창배
17
92
120호
김봉록
이민재
이진규/김승찬
18
93
121호
김봉록
이민재
조두환/이진규/김승찬
19
94
122호
김봉록
이민재
조두환/이진규/김승찬
20
95
123호
김봉록
이민재
조두환/이진규/강신태
 
 
<표 1> 십자가의 발행 연도 및 호수

1975년 8월까지 정동교회에서는 청년회로서 활동해왔다. 그러나 같은 해 8月초 충남 동백정 해수욕장에서 거행된 전교인 여름 수련회에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같이 발생된 문제가 교회청년회 헌신 저녁예배(당시 오후7시)에서의 시위로까지 번져 회장단의 자진 사표와 아울러 청년회자체가 해산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구제도적인 형태의 청년회 활동의 종식을 가져왔다. 새로운 활동을 기다리는 암흑으로 이 아픔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같은해 11月 1976년 회계연도를 위한 총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박노성(서울대3年), 김용인(이대2年)이 회장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십여명의 회원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아직 대학생회로 발족된 것은 아니고 76회계년도를 위한 준비로 볼 수 있다. 정기집회는 土요일과 日요일 두 번이며 내용으로는 토요집회에서는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자치 활동이었고 일요일엔 예배와 독서토론 및 신앙고백을 하였다. 75년의 커다란 행사로는 주일학교가 진행한 성탄행사(임마누엘 칸타타)에 참여 성가를 했고 송구 영신의 밤에 지나가는 이들에게 커피와 다과를 제공하면서 전도를 하였다.

드디어 1976年 2月에 들어서면서 대학생회로 발족되고 성숙과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집회는 목요집회와 일요집회로 나누어 졌고 목요집회(오후6:30 교육관 강당)는 1부 예배, 2부 강연, 3부 친교의 시간으로써 학생에게 영향력있는 국내 교수진들의 강연을 맡았다. 이의 목적은 신앙,지성,활동으로서 표현되어졌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주의적인 지성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앙이 요구되어졌다. 또한 신앙이 미신으로 탈선할 것을 막기위해 지성은 요구되어졌고,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이 사회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역사의 주체자로서 지성은 요구되어졌다. 그리고 이의 실천으로서 활동이 요청되어진 것이다. 이 목요집회는 반드시 믿기 위해서 나오라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젊은이가 다 모여서 함께 어울려 탐구해보고 또 세상의 문제를 나누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기독 청년을 만나 함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해보자는 것이었다. 76년 2월 하순부터 명암식의 안내서가 대학가에 배부되었고 3月 첫 모임에 190여명의 젊은이가 모였다. 계속된 집회의 강사진으로선 교회내에 이길상, 김은우, 문석형, 장병림 교수등이 계셨고 교회밖으로는 현영학, 서왕선, 차풍로, 고범서 교수등이 참여하셨다. 특별히 이 집회를 위해 목사님실에서 적극 지원하고 각 속회에서는 3부 순서를 위해 다과를 준비해 주셨다. 당시 담임목사셨던 은준관 목사님은 매달 1번씩 "성서의 드라마"(버나드 엔터슨著)르 지도하셨다.

명칭의 확실한 전이해를 위해 설명하자면 당시에는 대학생부와 대학생회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다. 대학부란 감리교 교리장정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교회학교내애 속해있는 부서이며 이의 책임자는 교육 행정 담당 부목사이다. 그리고 대학생회는 정동교회의 독특한 기구로서 자치 선교기관의 한 기구이다. 이것은 자치적으로 만들어진 회칙에 따라 조직과 회원이 구성되며, 이의 통수권자는 대학생회 회장이다. 그러므로 당시는 대학생부와 대학생회의 두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며 특별한 구분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교회학교내의 대학생부라는 틀에 자치조직인 대학생회가 그대로 들어앉은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1980년 감리교 교리장정에 따라 80년도부터 대학생부가 청년부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교회학교에 속한 청년부 속에 독자적 기구의 성격을 띤 대학생회가 정착하게 되며 대학생회를 대학부로 편하게 칭하게 된다. 즉 청년부라는 명칭은 서류상의 이름이고 이를 대학생회 즉 대학부가 대신하게 된다.

● 신앙 지성 활동에 관한글

<정동일설> 신앙 활동 그리고 지성 - 51호 십자가中

정동 대학부가 지향해 온 바는 신앙 지성 활동이다. 대학생들이 청년부에서 독립해 대학생부라는 이름을 가질 때 그의 취지는 바로 위의 세가지 뜻을 내세우면서 였다. 신앙은 우리의 거듭남 -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고, 활동이란 거듭난 인간이 거듭 태어난 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것, 곧 그리스도적 희생과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과 활동은 대학생부만의 독자적인 색채는 아니다. 이는 모든 신앙인이 가져야 하고 또 가지는 일반적 요소일 것이다.

그러면 대학생부만의 독특한 개성, 그리고 그들만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지성이란 말에서 찾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성이란 말이 가지는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대학부가 말해오고 그리고 또 우리가 지향하는 바 지성이 내포하고 있는 개념을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다.

「지성」은 비역사적이며 단편적인 정보의 축적인 「지식」과 구별하여 사용되야 한다. 지성은 정보의 축적인 지식에 사회성과 역사성을 포함시킨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지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역사적 방향 감각을 내포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지성이 가지는 의미는 사회에 대한 책임과 참여 정신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삶은 촌음도 사회를 떠나서 생존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속에서의 생활은 곧 끊임없이 선택과 결단의 연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은 곧 윤리적 결단,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판단한다는 것, 평가한다는 것은 비교한다는 것이고, 비교하기 위해서는 - 길이를 말할 때 자가 필요한 것처럼 - 평가의 기준, 평가의 척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 척도를 우리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사회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별히 지성(인)은 그의 사회적 역할상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더욱 분명하고 올바른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때문에 폭넓고 확고한 역사관과 사회관을 지녀야 한다. 즉 사회의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 연속적인 시간안의 인간행위를 어떤 가치관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지녀야 한다. 지성인은 한 개인을 넘어서 사회의 갈길을 염려하며 역사에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역사관을 설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역사관 설정이란 책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지적인 연구 작업, 동참하려는 의지위에 차가운 현실 이해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학부 회원들이 역사 사회연구를 한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며 당연한 우리의 요청이다. 신앙 지성 활동 - 균형있는 건강한 예수의 후예가 되려는 노력에 누가 갈채를 보내지 않겠는가?

● 대학부의 초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글

歷代 副會長論 (一代-7代) - 75,76호 십자가中

대학부의 역대 부회장들은 문자 그대로 "대학부의 꽃"이었다. 그녀들도 예외없이, 현대 전국의 여대에 재학하고 있는 2만 9천여명의 여대생들중 일부를 점령한다. 제3대 부회자이었던 한현경씨는 연대를 나왔지만 그녀도 간호학과 출신이므로, 역대 부회장들은 모두 "여대의 여대생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모두 7명의 부회장이 부회장이 배출되었는데, 공학의 여대생에 비해서 나머지 반쪽(?)에의 채움에 대한 욕구인지 몰라도 여대 출신의 그녀들은 남학생들의 과반수를 넘는 정동 대학부에서 다양한 과외활동에 참여했고, 때로는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목 클럽이나, 영어회화클럽, 야학 등의 교외 활동에 대해 전통과 명예 의식에 굳건한 초석을 다진 정동교회 내의 대학생들 써클에서 그녀들이 立身할수 있었던 첫째 요인은 남들과 융화하는 밝고 맑은 성격과 이에 부응하는 깔끔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수 있다.

먼저 76년도에 부회장을 역임하신 김용인씨(이대 사범대출신)는 초대 부회장 격이 되는 분으로 비교적 대학부 생활을 짧게 마친 분으로 알려졌다. 그 실례로 이주연, 한현경 커플이 회장단을 이룬 78년도초에 이미 결혼을 했고 그 뒤에는 정동교회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다음 77년도에 부회장을 역임하신분이 김조화(이대 문리대 화학과 출신)씨다. 당시의 극소수의 회원들로 구성된 대학부의 활동은 거의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김조화씨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와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겠으나 이화여고 재학때부터 우리 교회에 출석 특히 고등부와 대학부의 활동을 통해 초창기 대학부 집회의 산파역 중의 한 사람인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며 정동 90년사에도 대학부의 부회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분은 김조화씨다.

그 뒤에 감리교 신학대 출신의 정통파 신학생인 이주연씨와 콤비를 이루었던 3대 부회장이 한현경씨다. 한현경씨가 부회장이던 78년도는 지금의 본당으로 올라가는 층계에 있던 목사관에서 집회를 갖다가 그나마도 모일방이 없어 이화여고 내의 심슨홀을 빌려 목요집회를 꾸려나갔다. 주로 7:30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이대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신 분이 다름아닌 민영진 교수이다. 따로 일요일에는 집회를 정기적으로 갖지는 않았지만, 주로 대 예배후 애프터시간을 통해 고궁, 공원이나 회원들의 집들을 순회하며 즐겁게 어울렸다고 한현경 부회장은 회고한다. 한현경씨는 부회장이 되고난 뒤 곧이어 교회를 떠나던 일(?)이 생겼는데, 그때의 총무일을 담당했던 분이 마도윤씨다. 당시 대학부는 목요집회때 성경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따로 큰 행사는 갖지 않았지만, 여름방학때 강원도 고성 장신리에서의 하계봉사활동 같은 행사는 대학부 활동의 압권을 이루었다. 하계 봉사 외에는 일요집회를 대신해 영등포에 있던 영아원에서 그림도 그려주고, 영아들과 어울려 노는등 지극히 비공식적인 활동의 주역이 다름아닌 한현경씨다. 그 다음해(1979년)에 당시 서울대 음대 1년생이던 유흥렬씨와 회장단을 이루었던 분이 최혜경씨로 전임 한현경씨와 같은 맥락을 이루었던 부회장으로 알려졌었다. 임원진 구성이나 제반 행사의 결정권을 거의 유회장에게 일임했던 최혜경씨는 남 녀가 자유롭게 어울릴 수 없는 사회풍토하에서, 모인 여자회원과 신입회원들을 따뜻하게 포용한 문자그대로 "부회장 가운데서도 부회장"으로 손꼽힌다.

최혜경씨에 이어 부회장에 선출된 분이 황영란씨로 전임 4명의 부회장과는 판이한 양상과 활동 영역을 고수함으로써 그녀 스스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흔히 요즘 대학생들사이에 거론되는 "의식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무리없이 쓸 수 있었던 부회장으로 숙대 신문기자를 2년동안 지냈다. 역대 회장단 중 최초로 공식적인 임원진과 집행부를 분리시켰던 정중 황영란 콤비는 회원들간의 다양한 조직 시스템을 콘트롤 할수 있었던 회장단으로 평가되어진다.

대학입시제도의 개편으로 본고사없이 대학에 진학한 신입생들을 빨리 흡수할 수 있었고, 데모등 각종 학원사태가 없었기에 밝은 전망속에 81년에 출범한 6代 회장단은 군부대 방문등 예년의 관례적인 행사를 무사히 치렀고, 회사원등 일체의 비회원이 없는 순수 학부생으로 구성된 알차고, 실속있는 단체로서의 인상을 외부에 비췄다. 하지만 초반의 이러한 협조 무드와 회원들간의 멤버쉽은 얼마가지않아 허물어졌다. 78년부터 80년까지 지난 3년간 다져온 대학부 활동의 기조를 회장단을 무시했다. 전임자들이 쌓아온 기반위에 새롭고도 치밀한 대학부 활동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성가대 등을 조직, 회원들은 분산되고 어떤 구심점이 없이 지루한 불확실성만이 상존했다. 그들의 활동 운용의 특징은 목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철저히 비조직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퇴보와 혼돈 가운데 대학부활동의 형식적인 체계와 신앙의 정립을 위해 부회장 문순(이대 동양화과 3년)씨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침체의 벽" 운운하는 엽서가 회원들 집으로 배달되었고, 대학부사상 유례가 없는 임시 총회가 열리는 가하면 대학부 자체가 붕괴되는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많은 회원들은 문순 부회장이 대학부 이외의 활동은 일체 그만두고, 기관지 격인 십자가 편집이라도 충실히 할 것을 바랬으나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그녀마저도 안이하고 고루한 태도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하계 수련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친 문순씨의 뒤를 이어 부회장에 선출된 분이 지난 3년간 대학부에서의 반주를 맡았던 전혜숙(이대 영문과3년)씨 이었다. (81년 8월) 개인적으로 그녀의 성격과 독특한 활동 영역을 아끼는 선배가 많았으나 부회장으로서의 그녀는 어떤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봉사 활동 때마다 많은 성과를 올리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던 전혜숙씨도 문순씨와 마찬가지로 후배나 동료들과 함께 침체에 빠진 대학부에 의욕과 활력을 불어넣기 보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임한 듯 하다. 그리하여 전혜숙씨의 후임에는 숙대 국문과 1학년에 재학중인 유정미씨가 선출되었다.

● 초기의 농촌 선교 봉사 활동을 되짚어보며.. - 62호 이주연 선배님글에서 발췌

1. 제1차 봉사

1976년 7월, 대장 전영수 및 부대장 김용인외 18名이 경기도 화성군 동탁면에서 3박 4일간 2km 도로 보수 공사와 교회 개축 사업 및 여름 성경 학교 운영을 하였다. 특별히 대원수의 부족에 설상가상으로 남자 대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도로보수공사가 불가능할 형편이었으나 남녀 모든 봉사대원이 단합하여 새벽 5시에 기상하고 저녁 7시 30분까지의 희생적인 봉사를 하였다. 마침내 이러한 단결된 모습은 냉담한 주민들을 감동시켜 동리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참여케 하였다. 제1차 봉사의 특이할 점은 제1차 봉사인 만큼 계획 및 대원 훈련에 미숙함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간의 협동심이 눈부셨다는 것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부의 봉사의 장을 연 힘든 모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제2차 봉사

1977년 8월3일-8일 까지 대장 김규만 및 부대장 김조화외 16명이 강원도 원성군에서 평동 교회와 연합으로 한 지역에서 사업을 진행 시켰다. 평동 교회는 여름 성경학교 및 교회 건축 기초 공사를 하였고 정동교회는 야학당의 건립의 기초 공사 및 벽 쌓기 작업까지 하였다. 제1,2차 봉사는 대학생부 활동 초기 단계로서 대학생부의 연령 및 부원의 경험과 숫적 부족에 따른 대원 훈련과 계획상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열의와 회원간의 단결된 연대의식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특별히 회원간의 친목과 신앙의 형제애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3. 제3차 봉사

1978년 7월 26일부터( 특별 야학은 7월 19일 부터) 8월 2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반암교회에서 대장 이주연, 부대장 한현경외 40명이 봉사에 참여하였다. 대원 훈련은 5월 3째 주일부터 12차에 걸쳐 실시되었고 사업으로는 여름성경학교 2개 교회 (장신리 교회, 반암 교회)와 야학 2개반 (특별반:검정고시반, 일반반) 그리고 군부대 위문을하여 장병과 주민과 학생과의 유대를 강화하였고 소요 경비는 76만 4천원을 소요하는 커다란 사업이었다. 이것은 제1,2차 봉사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대학부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제4차 봉사

1979년 7월 17일 부터 8월 3일까지 대장 유흥렬, 부대장 최혜경 외 30명이 "세상에 외치고 싶어"라는 주제로 제3차 봉사와 같은 지역인 반암교회와 오봉교회에서 봉사를 실시하였다. 사업으로는 여름 성경학교 2개 교회와 야학 2개반(특별반 및 일반반)을 운영하였고 소요 경비는 70만 2천원이 소요되었다.

5. 제5차 봉사

1980년 8월 4일(월) - 8월 9일(토)까지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란 주제를 가지고 강원도 강동면 정동진리 영동교회에서 실시하였다. 정하봉 목사님을 모시고 정중 대장과 황영란 부대장 外 32명이 참석한 제5차 봉사활동 내용은 여름 성경학교 주민 전도, 보건 교육, 근로 봉사, 야학 청소년 선도 등이며 마지막 날은 수련회로 대학부를 위한 토론회 등을 하였고 예산은 총 81만 7천원이 소요되었다.

2.2 대학부의 발전

위의 내용을 통해 1976년 2월에 발족한 대학부가 70년대 후반에 보여주었던 활동 및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80년 서울의 봄을 거친 5공화국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81년 문순 부회장의 퇴임과 더불어 81년 8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대학생회 회칙이 임시총회를 통해 제정되고 9명의 임원으로 구성된 대학부가 그 뿌리를 내리게 된다(사실 그 이전의 임원구성에 대한 어떠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표2에 역대 임원단들의 명단을 기재하였으며 표에서 알수 있듯이 82년부터의 임원 명단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총회 보고서가 이때부터 보존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의 대학부 체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1과 표2를 통해 어느 정도의 시간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절에서는 80년대의 대학부 구성과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며 이 시기는 5공과 6공 초의 독재와 혼란의 시대였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주로 대학부의 교내 및 교외 활동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주요 봉사 활동인 농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다.

년도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신앙부
지성부 
활동부
편집부
76
박노성
김용인
77
김규만
김조화
78
이주연
한현경
마도윤
79
유흥렬
최혜경
80
정 중
황영란
81
최성호
문 순 
전혜숙
82
윤기철
류정미
불명
불명
불명
김영철
정진후
김형기
정 중
83
한기형
김혜숙
서동우
장현주
조정숙
이병일
송치영
김태경
윤기철
84
장용석
조정숙
김찬수
윤하림
장현주
백영미
정진
정기성
김애나
85
김종국
서동신
김희영
김희진
강미영
조경선
최운용
김태희
윤성혜 
이해진
86
김태희
강미영
차학규
김현숙
이수연
손기연
이혜진
안도훈
황인선
87
김병철
손기연
김명준 
박길제
김경미
이수연
장재웅
김선철
최진의
허재연
88
황익주
민성혜
최진의
이용은
김영실
박수미
이용래
강기석
이홍규
89
박수미
정현아
윤성필 
김유정
문행선
나병규 
임한금
이수진
이홍규 
황이주
강형석
안도훈
90
김유정
김선윤
황이주
조혜경
임한금
안지영
민지희
이홍규
윤성필
91
김영미
강승연
임도현
정순미
윤성희
문윤정
홍창기
정종서
이승인
92
정준건
이영규
김욱래
윤남기
나윤경
홍석정
정준면
이태희
윤석기
93
정해곤
최선아
이지용
최선아
윤희영
조기열
주경희
고재홍
이지용
94
이준호
김수진
박철수
이은진
정해광
김대근
이우희
허정훈
김진희
95
정해광
송영은
조형열
송영은
김진아
이은애
김준일
김현철
임재웅
 
 
<표 2> 大學部 歷代 任員團

아직까지는 교회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학번이 85,86학번 부터임을 생각할 때 80년대 후반의 대학부는 필자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으나 그 이전(80년대 전반)의 일들은 십자가의 글을 중심으로 파악해 나가려 한다. 그리고 90년부터 95년까지의 6년간은 이 글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이 시기는 가장 최근의 시기이며 "나의 사랑 나의 대학부"라는 글을 통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2.1 농활에 대하여

대학부의 주요 하계 봉사 활동인 농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해 농활의 목적 및 취지, 역대 농활 장소 및 활동 내역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매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뿐만 신앙 지성 활동의 대학부 이상을 가장 반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동 대학부의 농활은 1976년 7월 제1회 농촌 봉사 활동을 시작으로 81,82년을 제외하고는 연례 행사로써 매년 30여명씩의 참여로 실시되어 왔다. 초기에는 성경 학교와 근로위주로 실시되어 왔으며 80년대 들어와서 점차 야학, 부녀 활동반등으로 그 영역을 넓혀 갔으나 근래에는 활동 범위가 점차 줄어들고 농활의 의미 역시 점차 희석 되어가고 있다.

で...신앙 훈련을 위한 자체 교육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이웃의 삶을 체험...농촌을 배우고 이해...と ( 86년 제9차 농활 )

で...젊은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배우고....우리와 농촌 사람들이 주님안에서 하나됨 ....と ( 88년 제11차 농활 )

で...그들의삶을 함께 체험...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と ( 89년 제12차 농활)

● 농촌 활동의 목적

농촌활동은 대학부 회원 모두가 하나님 안에 하나된 모습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인 농민들 안에 뛰어들어 그들의 삶을 함께 체험하는 가운데 주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농촌 활동의 취지

기존의 농촌활동이 대학생이라는 안정된 위치를 차지한 우리가 낮고 소외된 농민들과 함께 하나됨을 느끼며 하나님 안에 같은 형제자매로써 서로의 삶을 배우며 주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여름학교와 주민전도 등의 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활동기간 중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가운데 대학부 회원 간의 성도의 교제에 충실한다.

● 농촌 활동 연역

제 1 차 : 1967.7. 경기도 화성군 동탁면

도로보수공사, 교회 개축 사업 및 여름성경학교 실시

제 2 차 : 1977.8.3-8. 강원도 원성군

야학당 건립 기초 공사, 벽 쌓기 사업

제 3 차 : 1978.7.26.- 8.2.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여름성경학교, 야학, 군부대 위문

제 4 차 : 1979.7.27.- 8.3.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여름성경학교, 야학

제 5 차 : 1980.8.4 강원도 강동면 정동 진리 영동교회

여름성경학교, 주민전도, 보건 교육, 야학, 청소년반

제 6 차 : 1983.7.24 - 30 전북 김제군 용지면 효정리 효정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봉사

제 7 차 : 1984.7.22 -27.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잠리 소망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봉사

제 8 차 : 1985.7.21-27. 충북 음성군 삼성면 용성 1리 용성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 마을잔치

제 9 차 : 1986.7.27-8.5.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영랑리 영랑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 마을잔치

제 10 차 : 1987.7.26-8.2.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영랑리 영랑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 마을잔치

제 11 차 : 1988.7.24-30. 충북 음성군 삼성면 한무리 교회

여름성경학교, 야학, 근로, 마을잔치

제 12 차 : 1989.7.23-30 강원도 영월군 서면 소오목 교회

여름성경학교, 부녀반, 근로, 마을잔치

제 13 차 : 1990.7.15-22 강원도 홍천군 내면 문암교회

여름성경학교, 주민전도, 근로, 마을잔치

제 14 차 : 1991.8.2-8.9 충북 중원군 금가면 하덕리 금가교회

여름성경학교, 청소년반, 근로, 마을잔치

제 15 차 : 1992.7.26-8.2 강원도 홍천군 내면 문암교회

여름성경학교, 주민전도, 근로, 마을잔치

제 16 차 : 1994.7.31-8.7 강원도 정선 숙암교회

주민전도, 근로

● 주 활동부서 및 목적

1) 여름성경학교

농촌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양식을 지도하며 농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길러준다.

2) 근로

직접적인 근로를 통해 노동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소외된 노동의 현실과 그러한 사회모순속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농민의 삶응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근로활동중 농민과의 대화를 통해 농촌의 문제나 마을에 대한 객관적인 상황을 자연스럽게 파악하며 성실한 자세로 작업에 임함으로써 학생들에 대한 농민의 신뢰감을 획득하여 이후 분반활동의 토대로 삼는다. 아울러 근로는 대원 개인의 내적 훈련과정으로서 고된 노동을 통해서 학생이 가지기 쉬운 나태하고 허약한 생활자세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는다.

3) 호별방문

농민과의 실질적이고 현실에서 닥치고 있는 농촌의 여러가지 문제점에 대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듣고 배우며 함께 고민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4) 선발대

현지 도착시 호별방문을 통한 농촌활동홍보, 포스터 부착 등의 일과 본대가 도착하면 사용할 여러 시설물을 설치한다.

5) 규율부

고된 일정 속에서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대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며 대원들이 생활 전반에 걸쳐 규율을 지키도록 한다.

6) 장비

농활에 대한 각종 장비를 기획,구입,관리함으로써 원활한 프로그램 운영에 기여한다.

2.2.2 십자가를 통해 본 1983년의 대학부

1983년은 80,81년의 혼돈기와 82년의 완충기를 거쳐 어느정도 안정되어가는 대학부를 느끼게 한다. 비교적 많이 발행된 십자가는 대개가 20쪽으로 이루어진('작은 십자가'정도) 간행물이었고 '바람소리'라는 란을 통해서 주요 행사들을 짚어나갈수 있다. 정기 집회 및 월례회 등이 회칙에 나온 바대로 존속하였으므로 최근의 대학부와 별반 다른 점은 없을 것이다. 월례회를 통한 활동 보고 및 계획이 있었고 28명의 회원이 동계 수련회를 갔다왔는데 다음 일요일에 꼭 평가회 시간을 갖었다. 이때는 졸업생 환송회와 Home Coming Day를 같은 날 하였는데 62명이 참가하였다. 3월의 3.1절 기념예배와 신입생 환영회(6명참여) 및 철야 기도회, 4월의 하계 농촌 봉사 활동 준비 1차 강연회가 있었으며 5월에 4부 쳬육대회(MS, 성가대, 청년부, 대학부 : 대학부 꼴등)와 2차 수련회(24명참가, 농활을 위한)가 있었다. 이때 새로이 대학부 지도 목사님으로 이선균 목사님이 부임하신다. 그분에 대한 소개를 십자가를 통해 들어보자.

● 이선균 목사님과의 만남 - 84호 십자가 中

대학부는 오랜 기다림 끝에 담당 지도 목사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요번에 정동 제일 교회 부목사님으로 부임하신 이선균 목사님이시다. 엄한 목사님이라기 보다는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형님, 오빠같은 분이시다. 목사님은 77년, 80년에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임상 목회 교육과정을 수료하셨다. 77년부터 전도사로서 목회를 시작하시어 우리 교회에 오시기 전까지 서대문 교회 교육담당 부목사로 계시었다. 목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누가복음 13장 33절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길을 가야하리니....."이라신다. 성직자로서의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정동 대학부와는 6월2일 목요집회 때에 첫 인연을 맺으셨는데, 정열적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회원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하신다. 철저한 연애주의자이신 목사님께서는 78년 5월에 목회하시던 교회의 평신도와 결혼하시어 벌써 결혼 5주기를 넘기셨다. 슬하에는 아드님 한명을 두셨는데, 끊임없이 백성을 깨우라는 뜻으로 鐘民이라 이름을 지어주셨고, 역사의 등불이 되라는 바램으로 212장을 종민의 노래로 정하여 주셨단다. 아무쪼록, 대학부회원의 신앙과 훈련에 힘쓰실 이 목사님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듬뿍 내리시길 간절히 빈다.

● 정동 Time - 이주연 (82호, 기획2)

일화가 하나 있다.

임진난이 일어나기 전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왜놈들은 침략 결정을 위해 최종적으로 조선 정탐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정탐임무를 띤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였었다. 사절단은 조정에 알현하려고 입궐을 하다가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후 이내 속으로 기쁜 탄성을 질렀다. 병사들이 소지한 창과 칼이 닦여져 있지 않음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정탐하지 않고 공격을 결정하였다 한다.

이 조그마한 일화는 자못 교훈적이다. 이 일화의 숨은 뜻은 창과 칼이 곧 힘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창과 칼을 닦아 놓은 병사들의 정신이 곧 힘이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창과 칼이 제아무리 많아도 역시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정동 대학부, 그들의 수효가 수백 수천이 된다 하여도 그 전통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여도 그들의 충성된 정신 곧 신앙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병사의 충성심이 닦여진 창과 칼 끝에서 빛난다면, 주의 군대의 위세는 시간을 지키는 데서 빛날 것이다.

사모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데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청와대에 들어가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시간-예배시간-이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약속을 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예수께) 한 것"이라는 복음의 정신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소한 만남부터 소중히 약속시간을 지킬 때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이 될 것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다함은, 작은 일을 적은 일로만 여기는 자는 경솔한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뜻을 가진 만남의 시간을 지키는 일은 곧 역사를 지키는 일이다.

정동 타임은 더 이상 시간을 어긴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시간을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성실때문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고, 안식일에도 병자는 고쳐야만 한다고 하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1. 정동교회 100년사중에 어느 때 부터인가 끼어 들어와 이제는 마치 전통과도 같이 이어져 버린 '정동 타임'

이제는 그 정동 타임이 이중성까지 띄게 되었다.

'약속 시간 = 실제 시간 + 상대방이 취할 예상 정동 타임(제 2의 정동 타임) + 정동 타임'

언제 또 3,4의 정동 타임이 생길는지 의문이다.

원래 약속이란 상호간의 신뢰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한 약속이 정동 타임이라는 하나의 합리화된 불이행에 의해 마침내 불신이라는 제 2의 정동 타임을 만들어 내었다. 가장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우리가 불신이 만연된 속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제제가 없는 곳에서도 자신과 상대방의 인격을 지킬 수 있는 젊음의 패기가 자못 아쉽다. 이제 밝게 맞이한 새로운 해. 좋지 못했던 묵은 습관을 버리고 서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봄이 어떠하겠는가?

2. 한국 사람의 기본적인 특질(?)이라고 볼 수 있는 지각.

어쩌면 이것이 벌써 세인들 사고방식속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돼 있는지 모른다. 항상 예의로써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 10-15분 늦어야 하고 남자도 늦으려니 기다리고.......

이것이 우리 정동교회 속에서도 깊이 뿌리 박혀 잇는 듯 싶다.

목요집회의 경우 원래 6시로 되었던 예배시간이 점차 6시 30분에 시작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고 그나마 시작할때는 몇 명 안되다가 좀 지난 후엔 꽉 차는 기분이든다.

물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있고 자기 자신으로 최선을 다한 사람도 있거니와, 그보다도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늦게와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사고방식이 있는 것 같다. 신속히 개인의 일을 하고도 시간을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20-30분은 늦어도 된다고 여유(?)를 부린다. 지금 이글을 쓰는 나 자신도 반성을 하고 있으나, 여러사람이 노력하면 더욱 좋은 대학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

3. 정동 Time : 시간을 꼭 지켜야 된다는 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차분히 예배를 맞이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기쁨, 일찍와서 친구를 기다리는 기쁨이 예배시간과 약속시간을 지키는 저희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쁜 생활이기에 제 시간에 맞출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친구와 만나는 기쁨을 생각하고 발길을 재촉하는 정성이 정동 Time뒤에 있기를 기도합시다.

주인 : 예수님께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시고 저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잔치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서로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잔치입니다. 저희들은 예수님 잔치에 초대된 손님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처럼 손님들을 진심으로 서로 섬길 때 저희들도 잔치에서 작은 주인이 될 수 있겠지요.

이때 대학부는 81,82년에 중단되었던 농촌봉사활동을 재개하게 되는데 회장단은 "농촌봉사활동의 재개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이의 취지를 알리고 있으며(84호, p3) 드디어 전북 김제군 용지면 효정리로 농활을 떠난다. 샛터에서의 하계 M.T가 있었고 목요집회시의 성경공부를 '통독을 위한 성서해설'로 하였으며 일요예배전 소그룹별 성경공부 모임을 갖었다. 3년만의 농활에 대한 그들의 후기를 간추려 들어보면..

● 농활 후기

김선영-나의 도움은 주의 이름

곳곳에 솟아난 땀띠와 악어(?)에게 물린 상처들, 우리 할머니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주근깨가 몇 개 더 늘어났지만 효정리에서의 7일간은 정말 못 잊고 감사한 날들이었다. 사발 시계가 울리기도 전에 발딱발딱 일어나는 서울 처녀들의 부지런함에 놀랐고, 대원들의 우람한 체격과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때마다 눈물로 기도하던 식사당번의 모습에 감격하여 나도 울 수밖에 없었다. 또 3650(36.5。C * 100명)의 효정 용광로 보다도 더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바빴던 정동의 이쁜이들을 보며 나를 반성했고, 자연 앞에서 묵묵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과 무드있는 조명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반짝이는 샛별들의 열망을 채워주고자 때아닌 땀을 흘려야 했던 밤손님들의 위대함(?)을 가히 알듯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추억뿐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한 사건이었음을 주님께 감사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며 잠시 어리석은 걱정을 하였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의 도구인 우리를 사용하시고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자세만 준비하면 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지금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나의 도움은 주의 이름이라고 외친다.

권균원

의식속에서 산 한주일, 사랑의 의식, 노동의 의식, 협동의 의식, 농촌의 의식, 하나님에 대한 의식, 눈물, 기쁨의 의식, 그리고 "카메라 의식"

이성일

그날 아침은 참으로 좋았소. 겹겹의 녹색 구름너머 우리들의 형제가 살고, 천년 묵은 恨은 서리서리 얽히고 있었소. 그날, 꿈을 밟듯 허공을 걸으며 땀을 뿌리려 나아갔고, 그날, 서로의 상처가 감싸지길 간절히 기원했고...... 그날 아침, 먹장 구름뒤의 햇살은 참으로 좋았소.

김영일

이몸이 죽고 죽어 무엇이 될꼬하니 김제땅 효정리에 에프 킬라 되었다가 봉사대가 다시 올 때 모기는 책임지리

2학기는 전희영부장선생님 댁 방문으로 시작해서 강연회와 가을 맞이 등산이 있었고 신앙부 주관의 설교대회가 있었다. 11월 말 정기총회로 회장, 부회장을 뽑았으나 부회장의 개인적 사유로 인해 12월말 임시총회를 열어 부회장을 다시 뽑았다. 약간은 조용한 2학기를 보낸 듯 하다. 그리고 이해의 마지막 십자가인 86호에서는 특집으로 "역대 크리스마스 행사"라는 글을 실었다. 대학부 초창기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글을 인용하였다.

● 歷代 X-mas 행사

① 1978년 행사

구제사업으로 회원들이 폐결핵촌을 방문하였다. 한편 일부 회원들은 종로, 을지로, 이대앞에서 불우이웃에게 카드를 전달하였다. 특히 이날 저녁에 우리 대학부는 동양방송국(TBC)으로부터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아서 6시 30분부터 10여명의 회원이 녹화에 참가했다. 이날 녹화내용은 주로 24일 대학생부의 활동과 이에 대한 회원들의 의견 교환이었다. 방송 출연을 마친 뒤 성탄절 심야 프로그램에 참여한 회원들은 0시 30분 (25일)부터 성탄 인사 및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오락과 게임을 즐겼다.

② 1979년 행사

새로 부임하신 담임목사님의 제의로 대학생부가 처음으로 본당, 문화재 예배당등 교회 전체의 성탄장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국 교회장식을 만족스럽게 마친 대학부에서는 목사실을 통해 의료대학생부, 성가대와 합동 성탄 예배를 제의하여 24일 자정에 본당앞에서 촛불 예배를 가졌다. 한편 24일 오후에는 고등부와 친교 모임을 가진 데 이어 합동 예배후에는 의료대학부와 (M.S)와 함께 오락시간을 가졌다. 결국 79년도 크리스마스의 특징은 교회내 다른 자치기관과의 합동 집회를 개최한 점이라 할 수 있다.

③ 1981년 행사

예전부터 교회장식의 일부를 맡아온 대학부가 81년도에는 문화재 예배당을 꾸몄으며, 도안에서 완성까지 직접 회원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카드가 교회어른분들과 선배님들 보이지 않는 회원들에게 보내졌고, 성탄전야에는 교회학교 행사의 하나로 대학부가 연극에 참여했다. 교회전체의 행사가 마쳐진 후, 대학부만의 기도회 시간을 갖고 아기예수의 탄생에 대한 참의미를 찾으려 했었다.

④ 1982년 행사

성탄절을 맞이하는 준비과정에 있어서 교회에서 만든 카드를 전교인을 대상으로 판매하여 이익금은 불우이웃을 돕는데 씌어졌으며, 촛불 예배에 쓰일 촛불 받침 만들기, 교회 어른 분들이나 선배님 그동안 멀어졌던 회원에게 카드 보내기, 교회 마당을 장식할 전구 연결시켜 달기등 밤을 지새며 M.T 아닌 M.T시간을 가지며 준비하였다.

성탄 전야에 있은 행사로는 교회학교 주관하의 연극에 참여하여 정동의 주인임을 확인해 보았고, 교회 전체 행사를 마친후 모든 회원들은 나름대로의 조용한 가운데 성탄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는 기도회 시간을 가졌고, 그 후 미리 준비한 카드와 커피 선물을 갖고 교회정문을 나섰다.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시청앞부터 남영역까지 걸어가며 이웃들(행상인,운전사,안내양, 경찰소근무자)에게 조그마한 사랑을 전했다. 이어 한 회원의 집을 방문하고 선물나누기와 이야기로 주님 나신 새벽을 맞이했다.

⑤ 1983년 성탄행사

십이월에 들어서면 우린 또 다시 성탄을 계획한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대학부는 올해도 기쁜 마음으로 본당과 문화재 예배당등 교회 구석구석을 장식한다. 올 성탄절은 교회 전체가 조용함 속에서 "가족과 함께"를 주장함으로써 우리 대학부 역시 경건하게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계획이 있다면 성탄 이브인 24일에 교회학교 주최로 "함께 나누는 성탄의 기쁨"이란 주제하에 조그마한 축제가 있다. 유치부를 비롯하여 모든 부서가 모이는 행사이다. 각 부는 또 소주제를 내용으로 발표회를 갖게 되는데 우리 대학부는 "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라는 무언극을 하게 된다.

2.2.3 십자가를 통해 본 1984년의 대학부

84년의 대학부는 "젊은 신앙인의 생활상 확립"을 목표로 출발하였으며 집회장소는 지금과 같았다. '대학부 모의 임원회'를 통해 방향성에 대해 토론하고 이선균 목사님과 함께 제1차 임원수련회를 가졌다. 목요 성경공부는 전년도 9월에 시작한 '통독을 위한 성서해설'의 구약부분을 마치고 신약부분으로 들어갔으며 7명의 졸업생이 참가한 가운데 졸업생 환송회가 있었다. 이때 Home Coming Day를 겸하지 않아 섭섭해 하던 선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항홀에서 군선교를 위한 사랑의 커피 판매와 일산 삼애 농장으로의 동계수련회가 2월에 있었다. 대학부 10주년을 준비하는 임원들의 마음가짐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회장은 장용석 선배님으로 최근까지 교회에서 많이 뵐수있었던 분이며 필자가 1학년때 M.T에 한 번 와주셨던 황인선 선배가 신입생의 글을 쓴 것이 눈에 뜨인다. 3월에 54명이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고 '대학부 회원 개인 기록부'가 나왔으며 김승찬 선생님이 대학부와 끈을 맺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4월의 십자가에는 "신입생에게 주는 글"이 매우 많은데 신입생에 대한 선배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5월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의 제목으로 철야 기도회가 있었고 정동가족큰잔치와 고등부와의 만남이 있었으며 6월에 농활을 위한 답사등 준비가 있었으며 7월 22일부터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소망교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한 6:28)라는 주제를 가지고 농활을 치루었다. 9월부터 성경공부가 바뀌어 "성서에서 배우는 인간상"이란 책을 가지고 공부하였고 다양한 실험예배가 있었다. 10월에는 정동 97년을 맞아 "정동제"를 문화재 예배당에서 올렸는데 대학부는 성극과 성가를 함께 나누었고 "미자립 교회를 위한 커피 비자"에 참가 봉사하였으며 11월에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마가 6:8)의 성경말씀을 가지고 수련회를 떠났다. 그리고 11월 25일 정기 총회가 있었다. 91호 십자가에는 종교 개혁에 관한 기사와 성경공부에 관한 기사가 주요하게 실렸으며 편집후기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2월 27일에는 임원단 교체식이 있었는데 장소는 김승찬 선생님 댁이었다고 한다.

2.2.4 십자가를 통해 본 1985년의 대학부

85년의 대학부는 역시 윷놀이와 신년 기도회로 시작되었고 임원 수련회가 대천에서 있었으며 대학부의 주제는 "젊은 예수를 닮자"로 정해졌다. 2월에는 3주에 걸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대학 문화와 대학 생활, 대학생회의 이념 및 교회와 대학생회 생활, 대학생회의 1년 행사 설명 및 회원과의 만남의 시간) 역시 졸업생 환송회가 있었다. 일산 삼애 농장으로의 동계 수련회가 '사회와 성서속에 비친 젊은 예수'의 강연과 함께 있었고 「민중 사회학」세미나를 시작으로 3월이 시작되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고 성경 암송 대회가 있었는데 이때의 신입생으로 눈에 띄는 분은 김건태, 손기연, 이수연, 안도훈 선배님으로 필자가 최근에 뒤의 세분 결혼식을 본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밥을 얻어 먹었었다. 십자가에서는 '한국 교회 100년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기획연재가 있었고 편집후기가 안보이기 시작했다. 5월에 팔당 근처 능내에서 춘계 M.T가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토론과 더불어 있었고 농활 준비 일정과 기본 방향에 대한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5월에 나온 94호 십자가에도 농촌 활동의 의의에 대한 기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6월에는 3주에 걸친 농활 세미나가 있었고 답사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7월에는 정동 가족으로부터 300권에 달하는 책을 수집하였고 7월 18일 드디어 발대식이 있었다. 이때 김승찬 선생님의 멋진 한마디 " 군기보다 사기가 중요하다"가 있었다고..

8월에는 농활 평가회가 무려 3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농활 전체 평가회, 분반별 평가회, 학년별 평가회 및 학년 모임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의 순서로 이루어 졌다. 역시 8월에 나온 십자가도 온통 농활 평가 얘기 뿐, 그중 농활 후기를 잠시 훑어보면.....

김혜숙

우리에게 늘 다가오는 것 - 사랑

우리에게 늘 요구되는 것 - 진실

우리가 늘 내세우는 것 - 최선

8월에 간헌으로 하계 M.T를 갔고 "대학부가 갖는 의미"의 주제 토론을 벌렸으며 9월은 마가 복음의 성경 공부 내용으로 성경 퀴즈 대회로 시작해 「현대 인간의 이해」라는 책을 가지고 세 번의 지성부 세미나가 있었다. 10월 31일에 '작은 발표회'를 젠센홀에서 많은 대학부 관계자 및 선배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었고 11월에 천마산으로의 추계 M.T가 있었다. 11월 17일의 정기 총회와 24일 교회 원로분들과의 당면 과제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12월 1일의 설교 대회와 크리스마스 이브의 김태희 선배님댁 방문, 26일의 신구 임원 교체식으로 85년은 저물어 갔다.

2.2.5 십자가를 통해 본 1986년의 대학부

86년은 김태희 회장과 강미영 부회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1표차로 2등을 눌렀다. 1월 1일의 신년예배로 시작해서 윷놀이가 이어졌고 신년기도회가 있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회장단의 일성을 들어보자.

●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 회장단 (97호, 정동일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었다고 무작정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은 굉장히 감상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해가 바뀔 때 마다 너무도 커다란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씁쓸한 한 해를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우리지 결코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금방 새로운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한해의 시점에서 지금의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는 사실 너무나 큰 것만을 바라보았고 추구하려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실패 할 수 있었고 쉽게 좌절했다. 또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가 흑이 아니면 백이 되기를 은근히 바랬다. 우리의 능력, 성숙 정도에 상관없이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깊은 좌절 아니면, 자신을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놀라운 기술.... 하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이러한 것들도 우리것이기를 허용받지 못했다. '대안의 시대'라지만 우리는 쉽사리 뚜렷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새해 아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니 우울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유리된 희망에 부풀기 보다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우리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조금씩 기어 올라 가는 길만 남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조금씩 올라가는 한해가 되길 우리 모두 바라자.

· 새해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시간을 갖자

우리의 능력, 신앙, 양심.....모두에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자

· 새해엔 작은 것에 눈을 돌리자. 그동안 큰것에 가려, 보지 못했던 작은 것들을 발견하려고 힘쓰자.

· 새해엔 풍성했던 언어의 유희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진실된 대화가 되도록 노력하자

· 새해엔 하나님께 좀 더 접근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노력하자

1월부터 5주에 걸친 지성부 세미나가 있었는데 세미나 자료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광장」「철학에세이」「역사란 무엇인가」「현대 인물사론」이 선택되었다. 역시 일산 삼애 농장으로의 동계수련회가 있었고 3월초에 신입생 환영회가 토요집회때 있었다. 이때에는 다소 조촐했든 듯하며 3월 30일에는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정성껏 만든 계란을 가지고 영아원을 방문했다. 잠시 당시의 신입생 자기소개를 소개하면...

● 86년도 신입생 자기 소개

황익주 - 米男, 고대 농학과, 이담에 쌀 걱정 말라구..(중략) 나는 무지하게 못났다(얼굴 말고) 그래서 정동 대학부에서 함께 부딪치고 모든 걸 사랑안에서 반항하고, 또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찾고자 한다. 다들 나보다 아는 것 많고 유식하다. 많이 배우겠다.

최진의 - (생략) 대학은 보물섬이라는 비유적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이제 갓 보물섬에 도착한 저에게 정말로 보물을 찾고 그섬을 떠날 수 있도록 선배님과 동료들의 많은 도움과 조언 부탁드립니다. 새싹이 채 움트기도전에 만난 대학부!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인가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합시다.

박길제 -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무식한 박 달제 입니다. 전, 4형제중 장남이고 집은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왕십리에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늙게 보이지만 남들이 없는 점을 달고 다니기에 얼굴엔 자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잘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 선배, 동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대학부에서 배우고 느끼고 믿고 실천하는 한 기독인이 되겠습니다.

4월에는 대학부를 통해 알렸던 'KBS 시청료 거부 운동'가 회원 개개인이나 대학부, 교회에 큰 파장을 미쳤고 5월 춘계 M.T와 6차례에 걸친 지성부 세미나가 1학기를 거의 채워버렸다. 이때의 자료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농촌의 빈곤 원인과 실황」「외향적 경제 발전과 농업 정책」「한국 경제의 진단과 반성」「토지, 가격 문제」「부채 문제」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란 주제로 7월 27일-8월 5일에 9차 농활이 45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있었으며 9월에는 지금까지 가장 두터운 100페이지짜리 십자가 100호가 발행되었다. 많은 내용이 담긴 귀중한 자료로서 정말 기획이 알차고 정성이 많이 담긴 십자가로 꼭 일람할 것을 귄하는 바다. 잠시 편집후기중 하나인 황인선 선배의 글을 보자.

● 황인선 선배의 편집 후기

여름의 길고 긴 장마후, 눅눅해진 이부자리의 곰팡이 냄새가 폐부를 찌른다. 푸른 하늘 아니 시퍼런 하늘에 날아 다니는 최루탄 가스가 눈과 코를 아프게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저들의 외침에 오늘도 괴롭다. 작지 않기 위해서. 가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 십자가 100호는 「외침」이길 바란다. 재연이와의 다툼과 사랑, 용래의 말없는 노력, 모든 사람이 좋다. 이런 우리의 좋음이 십자가 100호 안에 실려있다. 이제 십자가는 썩은 나무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의 젖줄로서 만들어야겠다. 어렵게 만들어진 십자가 100호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우리 회원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충정과 순수를 바란다. 지쳐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내려 주시길 바라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대학부 여러분과 편집부원에게 감사합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女子를...... 젊음, 야망, 사랑, 죽음, 허무, 맹랑, 한심의 仁善

8월엔 농활 평가회와 철야 기도회가 있었고 30일에 교회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회학교와 대학부"란 제목으로 대화를 나눴다. 9월엔 최인훈의 '회색인'으로 독서 토론회가 있었다. 이때는 목요일 대신 토요일에 집회가 있었는데 2학기에는 10-20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농활 후유증을 다들 걱정. 10월 12일에는 100주년 기념 행사를 앞두고 탈춤, 소고춤을 연습했으나 추수감사제 행사로 연기(실력 미달)되었고 11월 8일에는 K.K사건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가운데 지성부 주관 심포지엄이 열렸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주제로 24명의 회원이 강촌에서 추계 M.T를 가졌다. 그리고 11월 30일의 총회가 열려 김병철 선배님이 회장에 당선되었다. 12월 24일에는 신임회장의 집에서 올라잇 하였다. 27일에는 토요모임 2부 순서로 신.구 임원 교체식이 3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젠센홀에서 열렸다.

2.2.6 십자가를 통해 본 1987년의 대학부

87년의 대학부는 강화도 모양 농장에서의 임원 수련회(L.T)로 시작되었다. 두 명의 부장이 불참한데다 한 해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하지 않아 선배들과 십자가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1월 15일 목요 집회를 통해 L.T보고가 있었고 18일에는 김선철 선배님의 사회와 발길제 선배님의 발제로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세미나가 있었다. 역시 21명의 참가자 중 일부만이 토론에 참여해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노출했다한다. 이 당시의 십자가 사설을 인용해 본다. 대학부의 주제 의식에 대해 느낄수 있을 것이며 십자가의 언론 기능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어서 쓴 글은 당시의 사회 이슈였던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 대한 회장단의 정동일설이다.

● 새 임원단을 바라보며 - 편집부 (102호, 사설)

이제 새 임원단이 임기를 시작한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경험이 부족하다는 등의 우려가 많았지만 그래도 대학부는, 비록 그 방향을 알 수 없지만, 힘찬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배가 순항을 계속하려면 순풍에 돛을 달아야 한다. 순풍이 불지 않는다고 무작정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역풍에도 돛을 잘 이용하면 순항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항해에 익숙한 선원은 없다. 아무리 능숙한 선원일지라도 커다란 고난을 이겨내기 전에는 별 수 없이 풋나기 선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때 없이 찾아드는 시련은 인간이 그것을 이겨낼지 어떨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을 따져서 이겨낼 수 있는 것만 인간에게 부과된다면 그것은 이미 시련이 아닌 것이다.

정동 대학부의 새 임원단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한 해의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처음 시작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임원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등 여러면에서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 '주제'는 대학부에 있어서 한 해의 활동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따라 대학부의 '방향'이 결정되고, 대학부가 비로소 '색(色)'을 띄게 되는 것이다. 대학부의 분위기는 새 임원단이 임기를 시작한 현재에도 작년 농활 이후의 침체된, 어딘가 풀린 듯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상반기 활동은 물론, 대학부의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농활도 그다지 큰 성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하루빨리 지금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제의 설정과 거기에 맞는 참신한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안일함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한 마디의 차가운 질책이 필요하다. 안일한 감정으로는 큰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원단에 그러한 질책을 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대학부 자체의 회원, 특히 선배 회원들이다. 이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아가도록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항해가 제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묵직하지만 따뜻한 노련한 선원의 팔뚝이 필요한 것이다. 임원단과 모든 회원의 노력으로 분위기를 일신하여 주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나는 대학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을 대하며 - 회장단 (102호, 정동일설)

먼저 가신 학형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기를 기도 드린다. 인간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지고 눈만 뜨면 '정의'와 '선진조국'을 외치는 제5공화국에서 치안당국의 배려 속에 감추어지려고 했던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공세와 재야 세력의 반발로 어쩔 수 없이 빙산의 일각을 노출 시켰으며 , 이제 장관까지 경질하는 등 수습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전경차, 국방색의 옷, 화려한 색깔의 헬멧 뿐이고 코를 찌르는 고약한 최루탄 속에서 생활하는 대학생으로서도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세계가 서울 한 복판에 있었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얼마나 맞았으며, 전기 고문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신민당 조사단은, "박군 폐의 탁구공만한 크기의 출혈 반점과 손가락 사이, 사타구니, 목 등의 반점으로 미루어 전기 고문 개연성이 매우 높다. 법 의학상 전기를 몸에 대면 새까맣게 타므로 전기 고문을 위해 사전에 물을 먹이는 것이 상례이다."라고 말했으며, 이것은 당초 당국이 발표한 가혹행위 외에도 또 다른 고문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 대학생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것이라면 우리의 행동과 뜻은 어찌하여야 합니까? 이 작은 파문을 잠재워야 합니까? 이 사건의 성격에 관하여 경찰은 수사관의 과잉 의욕이 빚은 불상사로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려 하고 있으며, 남영동 대공 분실에는 흡사 중세의 고문실을 연상케 하는, 외부와 완전히 밀페 차단되고 오직 폐쇄회로를 통해 2단장만이 조사과정을 볼 수 있는 조사실 아닌 고문실이 20개나 설치되어 있는 점은, 사건이 결코 한 수사관의 실수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자행된 '조직 범죄'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뭐요, 뭘 알고 싶소. 우리 자식이 못돼서 죽었소. 이 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 하는 아버지의 피 맺힌 절규! 임진강 지류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저 하늘을 날다 물속에 가라앉은 당신의 빛이여? 고요히 잠들라. 당신의 누룩은 썩어 우리의 기름이 될 것이다. 한 마디의 기도보다도 당신의 뜻을 이어가리라.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씨는 그렇게 말했다.

믿음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 올바른 정의를 외치다 목이 쉰 사회, 인간 본위의 민주주의 이념이 발 끝으로 떨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역시 2월에 신입생 O.T가 3주에 걸쳐 있었고(7명이 참여) 동계 수련회가 일산 삼애 농장에서 있었다. 베델홀에서 졸업생 환송회가 있었는데 졸업생 9명과 회원 40명이 참가하였으며 졸업생 장기 자랑과 선물 증정 게임이 있었다. 3.1에는 대학부 주관으로 문화재 예배당에서 3.1절 기념예배가 있었으며 5일(목)에는 87학번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는데 신입회원인 정현아(현 교회학교 서기) 회원의 은은한 클래식 기타 연주와 정 송미(정준건의 누나) 회원의 청아한 바이올린 연주가 있었고 재학생을 대표해서 김선철 회원의 멋진 피아노 연주가 있었다. 3월에는 두 번의 신앙부 세미나가 '구약입문' '신약입문'이라는 책으로 있었고 활동부 주관으로 어린이 대공원으로의 야유회가 있었다. 103호 십자가의 정동 일설에 나온 '문화재 예배당 화재'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며 4.19에 대한 특집기사와 신입생 좌담회 기사가 특집을 장식했다.

5월에 경기도 양평에서 '너 나 우리'라는 주제로 춘계 M.T가 있었고 2주에 걸친 지성부 세미나 에서는 "광주 사태의 진상"과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다루었다. 마지막 주에 있었던 정동 젊은이 체육대회에서는 대학부가 사상 최초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여기에는 강기석 선배의 사력(死力)을 다한 역주가 있었는데 우승 소감을 묻자 " 김○○ 선생님의 '대학부가 무슨 수로 우승하냐!' 가 채찍질이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단다.

6월은 역시 농활 준비의 달. 답사와 농촌 활동 세미나가 있었고 21일에는 대학부 회원 12명이 종교 교회에서 열린 구국 기도회에 참석하여 민주화를 위한 바램을 기도로 호소하였다. 7월에 나온 104호 십자가는 전도에 관련된 특집 기사들과 농활에 대한 사전 준비 과정 및 논의 기사, 그리고 회원들의 여가 선용에 대한 특집기사로 이루어졌다.

드디어 7월 26일부터 8월 2일까지는 대학부 회원 36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영랑리 영랑 교회를 중심으로 제10차 농활을 "믿는자여 어이할꼬"라는 주제로 떠났으며 이전 24일에 8명의 선발대가 미리 떠나서 제반 시설 준비 및 각종 홍보, 청소 등의 작업을 하였다. 농활을 떠나기 전에 도서 수집이 있었고 농활이 끝난 후 4차에 걸친 농활 평가회가 이루어 졌다. 예년보다 심각한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농활이어서 진지하고 격앙된 분위기의 평가회였으며 농활을 폐지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8월에는 간현으로의 추계 M.T가 있었으며 30명의 회원이 "서로 받아 들이라"라는 주제로 조별 토론과 전체 토론을 하였단다. 여기에 농활 후 영랑리의 한 소녀에게서 온 편지를 쓴다.

● 영랑리에서 온 편지 (105호, 농활 후기)

황익주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요. 선생님도, 현아 선생님도 모두 다 보고 싶어요. 선생님과 헤어져서 무척 섭섭해요. 선생님께 엽서에 적어주신 말씀 따라 용감하고, 사랑 많고, 건강하고, 또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겠어요.

선생님 정말 고맙고 감사해요. 이번 기회로 예수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더 두터운 믿음 가지게 됐어요.

저도 커서 의사가 되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요. 무척 보람있는 일 같아요. 곡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생님과 정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선생님이 친 오빠 같아요.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헤어지기 전에 선생님과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선생님과 저희는 너무 아쉽게 만났다 헤어진 것 같아요. 좀 더 오래 동안 같이 있고 싶었어요. 선생님 저희 영랑 교회를 꼭 기억해 주세요.

선생님, 저 항상 주님을 믿고 주님께 감사하며 생활하겠어요.

선생님, 행복하세요. 선생님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주님께 기도 드리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또 편지 드릴께요.

1987.8.2 옥 화

2학기 그렇듯 지나가고 11월, 총회를 통해 회직 개정과 회장단 선출이 있었으며 회장에 황익주 선배, 부회장에 민성혜 선배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뒤에 임원단 교체식과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축되나 기록이 누락되었다. 이처럼 2학기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추축컨대 농활 후유증의 여파로 추측된다. 또한 6월 항쟁으로 불리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친 87년의 모습이기도 하겠다.

2.2.7 십자가를 통해 본 1988년의 대학부

드디어 올림픽이 있었던 88년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구속 수감 중인 노태우씨의 대통령 취임이 1월인가 2월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필자가 고2에 올라가던 시절이다.

대학부도 역시 임원 수련회로 88년을 시작하였다. 속리산에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는 주제로 있었으며 신입생 O.T와 신입생 환영회가 두 번에 걸쳐있었는데 박길제 선배의 "대학생활에 대하여"와 강기석 선배의 진행으로 이루어졌다. 2월 11일의 졸업생 환송회가 최진의 총무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정말 오래 간만에 일산을 탈피하여 대성리 Youth Camp에서 35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계 수련회가 있었다. 개강을 위한 기도회와 민속의 날 맞이 윳놀이가 전통을 이었고 "기독교의 본질" 신앙부 세미나, "3.1절 기념 세미나" 지성부 세미나, "현대와 크리스챤 윤리" 신앙부 세미나가 줄을 이었다. 이때 나온 십자가 중에서 손기연 선배의 "예수 그리스도", 양재형 선배의 "기독교와 현대사상"이라는 논문이 눈에 띄고 특히 박영주 선배의 시가 눈길을 자극한다. 그 시를 싣는다.

● 生成 - 박영주 (106호, 돌담길)

뼈가 부딪다

벌레 가는 잔인한 傷痕에

진한 클로로포름 香 무색한 病勢

차도가 없겠는데요

내 머리는 마취되어져 있고

양잿물 삼킨 듯이 죄는 목

무-울......무-울......

어디론가의 移動이 몽롱한데

불가능한 일이야

혀 차는 의사는 말이 더 크다

푸줏간,

갈갈이 찢기워 널린 돼지의 기분이

이럴까

조명은 붉게 내 搏動위에 있고

메스 날, 내 이마에서 섬뾵한데

그들에게 不信의 匕首 꽂힌 나는

보이지 않는 발악이 최선일 뿐이다

나는 결박 당해 있다

아스라하니 차가운 메스의 감촉이

무릎으로 오고

일제히 솟구치는

유의(遺意)

사물놀이 징소리

는 함성

저들이 무어야

천진한 아이 둘 얼굴 감싸고

눈물 쏟는데

다시 징소리

철갑 기사의 투구를 착용하고

흡사 람보와도 같은 폭격

바스라지는 무릎

누군가의 기나긴 비명 -

民主主義 만세, 만....

고꾸라지는 ○孃의 시야엔

흥건히 괴는 피가 보이고

시퍼러니 동강 난 하늘

하늘....

어머....니

大韓民國을 알으십니까

그 高空 창백한 푸르름과

흰 옷자락 설움 기운 歷史를 지닌

자그마한 내 조국을 아십니까

단군할배야 神話 속 靈人이고

제각기 分領인 채 통일의 偉業 꿈꾸며

말고삐 추슬려 山河를 넘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

亡國의 恨이야 순종 아닌

강요

챁 묻어나는 肉聲으로의 시인의 죽음은

암흑에 到來할 新天地의 豫光이었고

적을 궤뚫어 烈士의 죽음

光復은 그러나 異質적인 이데올로기의

兩分으로

詩人아

是認이여 -

내 거듭나 하늘을 보니

모순이 덤으로 흐르고

汚辱에 찌들은 不惑

옳아서 옳다고 말 못하면 이보다

더한 反逆 있겠느냐

번뜩이는 낫질에 애호박 갈리워도

이마마한 위한 거름되지 않겠느냐

或 대한민국을 아십니까

自由를 찾기 위해 남편 잃었더니

自由 찾았단 조국에서 오늘 아들마저도

잃었다는

한 老母의 절규를 혹 아십니까

아들은 죽어 산 증인 되렵니다

어머니

더 많은 조국의 아들들을 두고 갑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남과 북이 물밀 듯 터지는 날

우리들 외침이 歎聲하는 날

어머니

떳떳하게 당신의 아들 딸

양지 바른 곳, 무궁화 한 소절

그리고 목 놓아 울어 주십시오

왼 무릎이 없다.

목발 짚은 기인 그림자

동강 난 허리 싸안고

절룩이며

걸어 가고 있다.

분단42년사월이십구일 學 校

"찬양하라 내 영혼아" 제8집이 나왔고 대학부 야유회가 소요산에서 있었다. 'Broadcast News'의 영화감상이 있었고 대성리 샛터에서의 춘계 M.T가 있었다. 성경 공부로 「통독을 위한 성서 해설」을 5월 5일 마치었으며 같은날 농활 준비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때의 신입생 앙케이트에 글을 낸 이들을 살펴보면 민지희, 윤성필, 이희진, 강형석, 김선윤, 김한성, 조혜경, 김유정, 안미영, 황이주 선배들로서 대부분이 필자 신입생때의 임원들이다. 대학부라는 말로 삼행시를 지어보라 했을때의 글을 몇개만 살펴보면

● 삼행시 (107호, 신입생 앙케이트 中)

민지희 - 학부가 뭔지/ 교 성적이 뭔지/ 지런히 뛰어보자

윤성필 - 1. 통령이 다냐?/ 자가 다냐?/ 자가 다냐?

2. 학부에 오니/ 생도 많고/ 부가 될 사람도 몇 명 있더라

강형석 - 보름 지낸지가 엊그제 같더니만/ 교가 개강한지 이미 두달이 지났구나/

드런 구름처럼 끝없이 흐르는 시간이여

김한성 - 학에 들어오니/ 원에 다닐 때 보다는/ 모의 신임도가 커졌다

조혜경 - 학부의 앙케이트가/ 교시험문제보다 어렵다/

럽다. 이 앙케이트 문제 낸 사람이

김유정 - 학부원들은 대체적으로/ 교에서도 열심히 ○○하고/

지런하게도 대학부에서도 ○○한다.

안미영 - 학부 생활 재미있니? -응/ 교 선배도 많고? -응/

회장 이뻐? -응 (아니라고 하면 두 Miss 민 한테 혼나)

황이주 - 字로 시작하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字로 시작하는 말이 무엇이 있을 까?/ 족한 내머리로 생각하려는게 무리지

5월 22일 신앙부 주관으로 "사회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신앙부 세미나가 있었고 농활의 첫 번째 답사가 충북 음성군 한무리 교회에서 있었다. 6월은 박길제 선배의 시감상으로 시작해서 농활 세미나가 줄이어 이어졌다. 제목은 '한국 경제의 진단과 반성''한국 농업문제의 본질''이농 강요한 농촌 근대화 정책'이었다. 그리고 7월24일, 충북 음성군 삼성면 한무리 교회에서 11차 농활이 있었다. 7월에 나온 108호 십자가에서는 '신앙 공동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대학부인들의 신앙 문제를 설문 형식으로 다루었으며 안도훈 선배는 87년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또한 이홍규 선배의 '노동쟁의 사회 경제적 고찰'에 관한 논문이 실려있다. 109호는 남아있지 않은데 아마 농활에 대한 평가 기사 및 후기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0월 첫째주 경복궁으로의 고궁 나들이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한국의 미' 관람이 있었고 루이제 린저의 '북한 이야기'로 지성부 세미나가 있었다. 10월 마지막 주의 정동 젊은이 체육대회에서 대학부가 작년에 이어 2연패를 차지했고 11월 10일의 목요집회는 '두란노 온누리 찬양' 참석으로 대신했다. 추계 M.T는 다음 임원단을 구성할 87학번의 주도로 '나와 하느님, 나와 대학부, 대학부와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행해졌다. 19일에는 작은 발표회가 벌어졌는데 정송미 회원의 바이올린 연주와 사이코 드라마, 찬양으로 이어지는 발표회 후 인항홀에서 여러 선배들과 음식을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주에 총회가 있어서 회장으로 박수미 선배, 부회장으로 정현아 선배가 당선되었다. 12일 24일에는 문화재 예배당에서 <언 땅을 녹이라>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탄 축하 행사가 있었고 대학부는 무대 조명, 장치, 교사등으로 참여했고 마지막 순서로 '정동 찬양 선교단'을 이루어 찬양을 인도했다. 이날밤에는 강기석 선배님댁을 방문하여 올라잇을 하였고 29일 신구임원 교체식이 있었다. 회장인 황익주 선배의 이임사를 일부 살펴보면

● 어디든 향하여 간다 - 황익주 (110호, 이임사)

(생략)...88년은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격정의 시기였다. 나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수 많은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나는 가슴 벅찬 감사의 기도도 했으며, 세상이 끝난 것과도 같은 절망감에도 빠졌었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애착으로 소망의 기도를 반복하곤 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인간적인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갈등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인간집단을 공동체로 형성해 가는데 큰 어려움을 주었다. 나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 현상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갈등....... 그러나 이 모든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유일한 벗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이는 어떠한 현상속에서도 찬란했으며 본질을 향하는 힘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결코 되풀이가 아니다. 시간은 되풀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디든 향하여 간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 지표가 훤히 바라다 뵈는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자기에로의 길은 십자가의 길임을 또한 깨닫는다. 자기부정을 통한 자아확립, 불신을 통한 신뢰의 의지. 무능력에서의 능력 얻음. 이 모든 중심이 동일하다. Jesus!!!

2.2.8 십자가를 통해 본 1989년의 대학부

80년대의 마지막 해이다. 십자가의 사설로 이때의 분위기를 느껴보자.

●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 - 편집부 (100호, 사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동시에 새로운 임원단도 활기차게 일어서고 있다. 임기를 시작하게 되는 15기 임원단의 특색이라면 거의 모두가 고등부 출신이라는 점이며 나이가 같거나 비슷하다는, 동기란 면에서 어느기의 임원단보다 단합 결속이 잘되리라 믿는다. 따라서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하고 업무의 분화보다는 융합된 형식의 활동이 이루어 지리라 본다.

이에 즈음하여 설자가 느끼는 대학부의 분위기는 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고 이를 '꼴찌 의식'이라 명명하고 싶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타 교회나 모임을 보고 심히 부러워하거나 대학부의 모습을 비판하는 일이 종종 있으며 프로그램 중 어떤 것은 이들 교회나 모임에 참석하여 대학부에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얼마전 장로님께서 대학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본 대학부는 신앙의 활력으로 가득차 있는 곳 같습니다. 앞으로 성경 읽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기에 더욱 애쓰십시오" 이와 같이 우리 대학부의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반문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고 '나'가 '나의 대학부'에게 아무것도 해주는 것이 없으면서 바라기만 하고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큰 딜레마 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회원들이 느끼는 '꼴찌 의식'에 열심을 불어 넣고 부흥시키는 의무가 이번 출범하는 15기 임원단에 있다고 보며 이에 바라는 바는 임원부터 신앙의 '우등생'이 되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반성과 사태를 직시하는 시야, 변화에 적응하는 순발력 그리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꼴찌에게 있어서의 뒷걸음질이란 단어는 없다. 왜냐하면 꼴찌는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앞으로 향한 길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원들도 새임원단이 자신감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박수를 보내자.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야 말로 진정 주님께서 대학부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아닐까?

최초의 여성 회장인 박수미 선배에 의해 출범한 89임원은 1월 1일 신년축하예배를 드린후 이션균 목사님을 방문하였는데 세배를 드리지 않은 것에 후배들이 약간 실망하였다 한다. 경기도 양평에서 2일간 신임원 L.T가 있었서 대학부의 나아갈 바를 밝혔는데 N 임원의 끊임없는 방구 소리가 이번 L.T의 멋진 자장가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8일에는 L.T보고가 있었는데 교사를 맡은 몇몇 회원이 영화를 보러 가는 바람에 조금은 썰렁하였다. 22일에 청년부와 합동으로 헌신 예배를 드렸는데 대학부 회원들이 대부분 지각을 하는 바람에 애로를 겪었으나 연습 부족의 성가가 '훌륭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주에 걸친 신입생 O.T가 있었는데 다소 추상적이어서 약간 지루했다는 신입생의 평이 있었고 월례회에서는 회원들의 농활에 대한 평을 들었다. 2월 5일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는데 무려 14명의 신입생 있었고 나병구 선배의 멋진 춤이 백미였다.

12일의 지성부 세미나는 부장의 군입대로 차장이 대신했는데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였으나 너무 많은 양을 한번에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89년, 밖으로 눈을 돌리는 대학부 활동의 일환으로 임원단이 주축이 되어 모자원 원아들에게 대화와 공부지도를 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2박 3일간의 동계 수련회는 대성리 샛터 가람의 집에서 이루어 졌는데 추적놀이가 압권이었다. 단지 문제는 코스가 탄탄대로였다는 것.. 일일 데이트가 활동부 주관으로 열렸고 4년동안 동고동락을 같이한 선배들의 졸업생 환송회가 23일 있었다. 당시의 신입생 앙케이트에 나온 인물을 소개하면 신세철, 김혜련, 이병구, 정종혁, 김민경, 임형철, 신광철, 오명규, 김한영, 강진모, 강승연 선배님들이었는데 필자가 신입생이던 다음해에 대학부에서 자주 보게 된 선배는 강승연 한분... 다른 분은 안면만 있을 뿐이다.

또 졸업생 환송회를 통해 졸업하신 분들을 소개하면 강신영, 김건태, 김경미, 김병철, 김선철, 김정민, 손기연, 이수연, 장재웅, 정현원, 하석용, 김희영 선배님들로 80년대를 풍미했던 선배님들이다.

3월 5일, 대학부실에서 신앙부와 활동부 공동 주관으로 성경 퀴즈 게임이 있었는데 '승연이네 조'와 '세철이네 조'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여 승연이네 조가 막판 역전승을 하였다 한다. 전년도에 시작된 '해방 공동체' 성경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목요 성경 공부를 모색한 결과 A반, B반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성경지식이 갖추어진 3,4학년 선배들로, 후자는 기본적인 성경을 읽기 위해 '평신도를 위한 성서 읽기'를 택해 공부하였다. 4월에 북한산으로의 야외예배가 있었는데 윤모 선배의 '도깨비 빤스'가 히트했다고... 지성부 주관의 영화 'yel' 감상회가 있었고 또한 영화 '간디'를 본 후 토론도 하였다. 신앙부는 '종교에 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라는 책으로 세미나를 했고 성령에 관한 신앙부 세미나가 이수진 신앙부장의 인도로 행해졌다. 4월 23일 회장단 주관으로 '구국을 위한 기도회'가 있었고 30일에는 중앙대 할머니 동산으로 올라가서 단합대회를 했는데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였다. 경기도 용추계곡에서의 춘계 M.T가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있었고 주제는 '너희가 어찌 잠잠하느뇨'였으며 M.T 사상 최소의 인원으로 선발대가 모두 목사님 봉고차를 타고 가는 이변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면 모자원 활동에 대한 글을 보자.

● 모자원 방문 보고 - 강형석 활동부장(112호, 소그룹 활동 보고)

작년말, 15기 임원단이 구성된 후 우리 정동 대학부가 사회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다 결정된 것이 모자원 봉사활동이었다. 자원 봉사 능력개발연구회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해방모자원을 방문한 것이 2월 초였다.

먼저 모자원에 대한 소개부터 하고자한다. 모자원은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들이 입주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회복지기관이다. 아이들의 나이가 만 13세 이하일 때에 입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만 3년간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다.

해방 모자원의 경우에는 24세대가 생활하고 있고, 도서관과 약간의 놀이기구가 있다. 아이들의 수는 약60명이며, 최고 학년은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교회에 나가고 있으나 모자원에서 반강제적으로 교회에 나가도록 권장하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많은 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지내는 수가 많다.

현재 모자원 소그룹을 하고 있는 회원의 수는 12명. 그중 차장급 임원까지를 제외한 평회원은 단 2명 뿐으로 대부분이 임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5월 말에 군대를 가게 될 회원도 있어서 더욱 참여 임원수가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가 알아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20명이다. 그 중에서 국민학교 6학년과 중학생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모자원에 도서실이 있다고는 하지만, 오후 6시쯤에 문을 잠그기 때문에 늦게 오는 대다수 학생들은 이용하기가 힘들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참고서와 공부할 장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아직도 우리들의 도움을,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너무도 많다. 다음달이면 11명의 회원만으로 소그룹 활동을 하게 된다. 시간에 붸기고 있는 여러 회원들이 많겠지만, 일주일에 2시간 정도만이라도 뜻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회원은 없으신지....

다음엔 역시 농활 준비. 7월 10일-15일에 농활을 앞두고 매일 아침 10시부터 젠셀홀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기도회 후에는 농촌현실에 대한 세미나와 부별 준비 활동으로 이어졌으나 회원들의 참여부족으로 프로그램이 변동되는 일도 많았다. 드디어 7월 23일 - 30일에 강원도 영월군 서면 소오목 교회를 중심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주제로 12차 농활을 다녀왔다. 때아닌 장마로 근로는 시멘트 나르기 정도로 축소되어야 했고 대신 여름 성경 학교, 부녀반, 호별 방문등 부서별 활동이 강화되었다. 한편 21일 출발한 선발대는 강우로 교통이 단절되어 지게로 짐을 지고 개울을 건너는 사태가 발생, 예상치 못한 비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8월에는 양일간 경기도 장흥에서 하계 M.T겸 농활 평가 수련회가 있었고 13일에는 활동부 주관으로 성경 퀴즈 시합이 있었다. 대학부실에서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행해진 이 시합은 김한성 회원의 단독 독주로 그 팀이 이기는 듯했으나 공권력이 우세한 상대방 팀이 승리했다(?). 8월 20일 신앙부 주관으로 영화 '로메로' 관람이 있었으며 16,17일 양일간 교회 경노실에서 하계 L.T가 있었다. 또한 농활을 다녀온 소오목 마을에서 생산된 고추를 판매하기 위한 활동도 더불어 하였으며 9월 부터 목요 성경 공부가 개편되어 신약 마가 복음부터 성경 공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주일 아침 10:30에 소그룹 활동으로 사회 과학 공부 모임이 있었다. 역시 8월에 나온 89년 마지막 십자가 113호는 농활 평가와 후기로 이루어졌고 회원들의 짤막한 감회가 농활의 느낌을 대변해 주고 있다.

● 딛고 일어서는 농활이 되어야 - 편집부 (113호, 사설)

많은 걱정과 기대 속에서 제 12차 농활을 무사히 마쳤다.

학기초엔 대학부 자체의 역량부족고 농활 불필요론등 아예 농활을 떠나지 말자는 일부 주장으로 적잖은 혼선이 야기되기도 했고, 또 떠나기 직전까지도 우리 내부의 능력을 우려하는 가운데 출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 우리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무사히 농활을 마칠 수 있었음을 모두 같이 경험했다.

준비과정의 소홀함으로 실제 행사를 진행함에 당혹함을 느꼈을 때, 회원간의 사소한 의견 대립으로 서로의 감정에 마찰이 있었을 때, 처음 농민을 마주 대해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쑥스럽고 어색해야할 때, 또 어려운 기상변동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될 지 몰라 헤메일 때, 주님은 사랑과 은혜의 두 팔로 우리를 안아주셔서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셨던 경험을 기억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체험에 기뻐하고 만족해서만은 안 될 것이다. 우선은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교회 밖으로 널리 전하는데 힘써야 한다. 사실 이번 농할에서 우리가 얼마나 선교활동에 주력했는가는 돌이켜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예년처럼 농활이후에 나타나는 불성실한 모습은 당연히 일소 되어야 하며, 오히려 이번 농활을 통해서 예정보다 나은 곳으로 딛고 일어서는 소중한 경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회원 각자는 이번 농활을 통해 안으로 자신을 추스려 자신이 그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변화를 초래했고 또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할 지를 곰곰히 곱씹어 보는 중요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겠다. 강원도 영월군 소오목 마을은 이제 더이상 강원도 어느 두메 산골 속의 낯선 마을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 농활을 딛고 일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데 몸과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2학기가 흘러갔다.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십자가에는 기록이 없다. 10월인가 11월에 이민재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고 11월에 총회가 있어서 김유정 회장과 김선윤 부회장이 탄생했다. 12월 28일에 신구임원 교체식이 있었고 90년 1월 1일에 신년축하예배를 드린후 이선균 목사님댁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했고, 2일에는 이 민재 목사님 댁을 방문하여 저녁 식사후 윷놀이를 하였다. 5-6일에 양일에 걸쳐 임원단 L.T가 교회에서 있었고 90년의 주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θ이시니,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랑으로 행하며 강건하라"로 하였고 7일에 L.T 보고를 하였다. 14일에 신앙부 주관으로 경복궁에서 대학부 신년 기도회를 가졌고 2월 4일에 유년부실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있어서 필자가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80년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비젼의 90년대가 시작되어 대학부는 새로운 도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70년대 후반을 연 대학부와 80년대를 통해 성숙한 대학부의 90년대는 어떠할까?

3. 結 論

필자가 대학부에 몸담은지도 어느덧 딱 6년이 되었다. 앞의 14년 역사를 합하면 20년이 되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두 번은 환골탈피 했을 대학부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막연하고 길어보인 역사였지만 과거의 십자가를 읽어보고 정리하고 하는 사이에 굉장히 친숙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76년의 어수선한 유신 정국에서 대학생회가 생겼고 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전두환의 5공화국, 그리고 87년의 민주화 투쟁이후 6공을 겪었고 지금은 소위 문민 정부의 틀안에 있다. 신지활의 이념을 추구하기에 당시 사회 상황을 무시할 수 없고 우리의 θ를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새로움들을 발견해 나가면서 느낀 것은 매 해의 임원들은 자신들에게 만족하지 못했고 지지부진한 세미나와 회원들의 무관심에 가슴아파하고 절망도 하였으며 또한 따스한 인간애와 사랑도 느끼며 대학부를 이어나갔다. 이것은 20년의 역사를 통해 변치 않았다. 십자가의 원고를 늦게 내는 습성, 정동 타임, 책 안 읽어오기, 불충분한 노래 실력 등등 언제나 선배들은 똑같은 사실들로 고민하였다. 매해에 새로운 계획 세움을 통해서 많은 계획을 세웠고 비록 그것이 전년도와 비슷하더라도 새롭게 추가된 몇몇이 있었고 신선하고 개성 강한 새로운 신입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들의 배움과 자신의 특성으로 새로운 대학부를 다시 한 번 만들어 나갔고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아무리 자신의 때를 퇴보의 때로 보더라도 먼 훗날 지긋이 바라볼 때 그것은 모두 발전과 성숙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이글을 읽는 선배님들은 자신이 대학부의 한때를 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이고 그 순간이 소중했음을 느낄 것이다. 물론 대학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아름답고, 자신의 모자람과 대학부의 한계에 가슴아파하던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전통의 무서움도 느낄 수 있었는데 매년의 대학부는 역시 방학을 맞이한 여름과 겨울에 그 절정을 이루어서 많은 활동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이며 거의 변치 않았던 1년의 행사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임원 L.T → 임원단 성경공부 → 신입생 O.T → 신입생 환영회 → 동계수련회 → 졸업생 환송회 → 고등부와의 만남 → 춘계 M.T → 정동 큰잔치 → 여름 행사 → 하계 M.T → 임원 하계 L.T → 추계 M.T → 정동 젊은이 체육대회 → Home Coming Day → 총회 → 크리스마스 이브 → 크리스마스 → 임원단 교체식

글을 쓰며 느꼈던 바는, 여름행사로 20년중 4번(80,81,93,95년)을 제외하고 다녀온 농활의 위력이다. 새 임원을 뽑고 신입생을 받고 졸업생을 보내고 하는 따스한 행사(선배들도 많이 오고 새로운 얼굴도 많이 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행사)로 겨울을 보내고 봄의 여유로움 속에 서로의 얼굴을 익혀 나간후 준비가 시작되는 농활, 그속에서 선배들은 대학부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신지활의 모든 것이 나타나고 많은 인원과 고된 노동과 성난 찬양이 함께 하는 농활을 위해 많은 선배들은 그들의 힘을 쏟아 부었다. 철저한 평가회를 통해 스스로를 추스렸으며 자칫 빠질수도 있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재미로만 뭉친 단체를 위해 신성한 교회돈을 쓴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신선한 바람과 더불어 대학부의 사색의 시간은 시작된다. 전반적으로 원이 좀 줄고 회원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도 만회할 겸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후년의 임원이 될 회원들이 준비하는 추계M.T를 고비로 대학부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크리스마스가 있는 연말을 향해 달려 나간다. 대학부가 이 모든 1년의 과정과 20년의 흐름속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던 큰 이유중의 하나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목요 성경 공부이다. 때로는 토요일로 옮긴 적도 있었으나 이시간의 모임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설날이든 추석이든 시험때든 아니든 세 사람이든 30명이든 언제나 끊임없이 열려 왔다. 때로는 그것이 임원이나 회원들을 지치게도 하였지만 역사는 그렇게 창출됨을 느낀다.

이제 대학부는 그 명칭을 달리한다. 어떻게 보면 대학인만이 모여서 할 수 있는 터전을 상실하는 것이다. 선배들은 자신의 추억을 잃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농활도 아마 다시는 안 갈 것이다. 과거의 추억을 기리며 교회의 문을, 대학부의 문을 두들겨 보던 선배님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며 오늘날의 우리 후배들의 판단을 믿어주시길 바랄 뿐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만들어진 상황이 나중의 정동대학부50년사를 쓰는데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마무리를 해야 하겠다. 과연 '이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많은 워드 작업 속에 수시로 느꼈졌지만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대학부에 대한 정리이다. 새로운 부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가슴벅참으로 워드의 손길을 멈추었고 불현 듯 솟아나는 過去史와 過去人들이 나의 마음을 울적하게도 흐느끼게도 했다. 대학부와의 6년을 끝으로 나는 사회인이 된다. 대학부를 잊지 못하고 사랑할 것이며 선배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새로이 출발하는 후배들에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貞洞敎會大學部史 20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