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Ⅰ : 정동대학부 20年

나의 사랑 나의 대학부
- 지난 6년의 아름다운 발자취
임도현 (90)

처음 원고를 부탁받았을때는 뭔가를 쓰고 싶었기에 은쾌히 O.K를 외쳤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글은 안으로부터의 벅참과 열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기에 후회함이 다가왔고 그런 열의와 의욕이 생기지 않는, 조금은 둔화된 나의 머리와 감성이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대학부의 초년병 시절에 가졌던 호기심, 열정, 꿈, 슬픔의 느낌과 가슴저민 감동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긋한 믿음은 나에게 무궁무진한 필력을 제공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글쓰는 솜씨의 모자람을 매꾸어 주던 내부에서의 울림이 이제는 소멸해감을 느끼며 타인에 대한 지나치게 집착적인 관심도 이제는 자신만을 향하게 되었다. 문득문득 솟구치는 글에 대한 의욕도 처음의 몇줄로 이내 그 수명을 다하고 만다. 그나마 작은 십자가에 내고 있던 '중국소사'라는 지식적인 글만이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글이 되버렸다. 지금은 매우 늦은 밤이고 육체적으로 좀 피곤한 상태다. 이럴땐 더욱 글같은 글이 안나오는 것이 내 경험이지만 왠만하면 오늘밤 내로 이글을 마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램이다. 온밤이 내밤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없이, 제한된 분량없이 글을 쓰고 싶은 것 또한 나의 바램이고 독자의 식상함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도 나의 바램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런 나를 포용할수 있음을 믿기에 마음은 편하다. 그러면 과연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대학부에서의 생활이 이제 6년을 가득 채워간다. 졸업은 이미 했지만 아직은 그런 느낌이다. 올해는 약간은 덜하지만 그래도 주일이면 향해지는 곳이 대학부이다. 어찌보면 우유부단함의 극치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내 삶에 대학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가 큼을 의미한다. 마치 유행가 가사의 한구절 한구절이 실연한 연인들의 마음을 자극하듯이 대학부의 한주 한주가 나의 관심사이고 한토막 과거의 이야기는 연인들의 다정했던 추억과도 같다. 이제 나는 대학부의 작은 역사를 쓰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이며 진실되고 객관적인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순수히 개인의 역사다. 나의 주변만을 나는 느낄수 있다. 걱정되는 바는 그 역사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빠져 보일 수 있다는 것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상당히 길어질 수 있다는 걱정도..... 많은 등장 인물이 나올 수 있고 이글은 그들에 대한 짧은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넋두리에 후배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대학부를 처음 알게된 것은 고2시절이다. 기독 신앙을 찾아 이리저리 전전하던 누나(당시 대1)는 강남의 모교회에서 예수님에 푹 빠져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 그것은 사실 미친짓 내지 이해 안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천주교 재단의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누나가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되었구나라는 느낌을 가질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는 나에게 한권의 책을 보여 주며 그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지 말지를 물었다. 누나 친구가 그 교회를 떠나라며 전해준 그책에는 우리나라에서의 이단 종교(특히 기독교 계열)에 관한 책이었고 누나가 다니던 교회도 그안에 속해 있었다. 나는 떠나라고 말했다.(이단이라는 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는 새로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말했고 그 교회는 그 누나친구(88, 안지영, 초등부 교사였고 90년도에 대학부 신앙부장)가 다니던 정동 교회였다. 그 이후론 나는 누나(88, 임한금, 89,90년도에 회계)의 교회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다만 가끔씩 언제 어디서 무엇이 있으니 연락 전해달라는 예쁜 목소리 아가씨의 전화를 받아 주었고 M.T등을 갔다와서는 은근히 자랑하는 누나가 약올랐을 뿐이었다. 특히 농활을 간다고 몇일씩 집을 비우고 몇일만에 올때는 완전히 촌녀가 되어 있는 것이 한심할 뿐이었다.

대입 시험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교회 대학부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 꼭 오라는 것이었다. 고3 시절의 정신적 갈등으로 신을 갈구하기 시작하던 나였지만 새로운 환경에 쉽게 뛰어들 만큼 용기있지 못했기에 고3 같은반 짝인 태희(90, 이태희, 92년도에 활동부장)를 꼬시기 시작했다. 같이 가 보자고. 한번은 집에서 나와 태회가 동시에 누나로부터 협공을 받았고 같은 학교 선배라며 전화를 걸어 O.T참석을 강력히 추천한 지희누나(88, 민지희, 90년도에 지성부장)가 있었다. 참석을 약속한 나와 태희는 약속장소로 덕수궁을 정했으나 막상 그 시간에 태희는 경복궁 앞에 나는 덕수궁 앞에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집에 가버린 태희를 다시 불러 교회를 향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보인 교회에 대한 첫인상은 아직도 강렬하다. 소복히 쌓인 눈과 벽돌로 만들어진 교회, 세상에 이런 정경이.... 교회를 처음 들어설때의 떨림이라니, 대학부에 들어 갔을때의 인상은 대학(생)的이라는 것이었으며 당연히 또다른 신입생을 발견했다. 점심시간대였는데 대학부실에는 단한명의 신입생이 앉아 있었다. 그는 종서였다.(90, 정종서, 91년에 활동부장) 서로 말을 트자면서 계속 존대말을 써댔다. 이윽고 O.T시간, 유아부실에 모였고 조그마한 의자에 모든 신입생과 임원 몇명이 둘러 앉았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넓은 원이었다. 20명은 된 듯했고 끝날때 누나 말이 이렇게 많이 올줄은 몰랐단다. 그때 유난히 눈에 띈 여인은 유라누나(90, 임유라, 현중등부 교사, 재웅이 누나)였는데 나이가 하나 많음을 알고 포기했었다. 다음은 신입생 환영회였는데 홍규형(87, 이홍규, 90년전후에 임원다수, 당시 방위)의 기타로 변진섭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 기억나고 좀 야한 게임을 했었는데 교회에서도 이런것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첫번째 애프터는 수정 다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후배에게 말을 걸어주려는 선배의 노력이 눈에 띄었고 밖에 나가 가볍게 먹을 과자등을 사오는 누나 임원들이 인상적이었다. 첫번째로 참여한 일요일 프로그램은 혜경이누나(88, 조혜경, 90년도 서기, 얼마전 기석이형과 결혼)진행으로 열린 독서 토론회였고 그룹으로 나눠 진행되었는데 책은 엔도 슈사코의 '침묵'이었다. 책은 읽어가지 못했지만 무척 진지했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오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몇주후 애프터에 땅딸막하고 곱슬인 한 친구가 보였는데 나중에 그의 이름이 욱래(90, 김욱래, 92년에 총무)임을 알았다. 얼마후 동계수련회가 있었고 설렌 마음으로 짐을 싼채 교회로 향했다. 교회 로비를 서성일때 처음 보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 누나가 꼭 가보라고 해서 와보았다고 했다. 일산의 수련관으로 향하는 버스내에서 그와 계속해서 대화를 했었는데 얼마 안간 동기중의 하나라 굉장히 의지가 됐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준건(90, 정준건, 92년에 회장)이였다. 동계수련회는 굉장히 타이트했고 좀 추운 상태로 진행되었다. 연탄 난로 하나만 덩그렁 있는 넓은 마루바닥에 빙 둘러 앉아서 많은 얘기를 했고 정말 많은 노래를 불렀었다. 저녁의 촛불 기도회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기도를 했었다. 약간 겁도 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후의 동계수련회에서는 그런 울음을 듣지 못했다. 그 수련회는 이민재 목사님도 처음이었는데(몇달전에 정동교회에 부임하셔서) 무척 인상좋은 목사님으로 비쳐졌었다. 동기모임 프로그램때는 감전게임을 했었는데 국민학교 이후로 여자손을 잡아보기는 처음이라 무척 어색했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임원 선배들이 그 위 선배로부터 그런 게임을 하게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무척이나 혼났단다.) 그렇게 겨울 방학을 마치고 1학기가 되었고 그때부터는 목요 집회가 너무 재미있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책으로 창세기를 공부했었는데 예배후에 성경공부가 있었고 6시에 시작해서 9시 좀 넘어서 끝났다. 발췌자의 발표 설명이 있은 후 항상 그룹을 나눠 토론을 했고 각 그룹별로 사회와 서기를 두었다. 시험때면 사람이 안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적은 수에 끼는 것도 무척 아늑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교회 타자기를 사용해 발췌를 하던 것도 무척 큰 흥미였다. 집회전에 노래를 30분정도 이주형(88, 황이주, 90년에 총무)의 기타에 맞춰 불렀는데 운동권 노래를 7할정도 불러 약간 이상하게 느끼기도 했었지만 이내 익숙해 졌다. 대성리로의 봄 M.T후 여름에는 농활이 있었고 대부분의 대학부 사람들이 모두 참가했었다. 강원도 산골짝이었다. 홍천행 버스 4시간과 마을버스 2시간, 그리고 걸어서 산을 넘어 2시간, 꿈속에서나 그리던 마을이었다. 비록 부촌인 것이 말이 많았지만 몇십년된 교회를 제외하고는 구멍가게 하나 이발소 하나없었다. 가정집과 교회하나 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배추 심기가 주 종목이였는데 첫날은 얼마나 몸이 뻐근했는지 모른다. 일을 끝내고 득의 만면해서 돌아왔을때 철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선배의 위엄과 여유에 경험의 차이를 느끼기도 했다. 중간에 내린 비로 하루종일 쉴때 느낀 오붓함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중간에 들어오는 간식에 따스함이 느껴졌고 매일매일의 기도로 대학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이며 그들의 축복을 빌어주던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하루는 얼마나 울었던지...

그때는 맹세했었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노라고. 주뜻대로 살리라고.

서울로 돌아왔다.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농활은 큰 뭔가가 되어 있었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회식을 간단히 하고 사람들은 마중나온 부모님들의 차로 하나둘씩 흩어졌다. 나와 누나는 30번 일반버스를 탔다. 좌석도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나와 누나는 아무말도 없었다. 아니 말할수 없었다. 나 자신의 터질 것 같은 격정과 보람을 조용히 삭이고 있었다. 밥순이 누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계 M.T가 있었고 89누나들이 준비한 추계 M.T가 있었다. 물론 불우이웃 돕기를 위한 일일 찻집도 기억이 난다. 연대앞의 '사람들 사이에서'라는 카페를 빌렸고 저녁때는 그자리에서 Home Coming Day를 했었다. 내가 만든 티켓이 쓰이는 것이 기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30장이나 판 나의 능력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한가지 미안한 것은 우리동기들이 준비한 연극이 너무 수준이하라 Home Coming Day를 망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그것으로 괴로왔었다. 선배들도 혼났단다. 그렇게 2학기가 갔고 대학부는 다음 임원문제로 말이 많았었다. 세또래라 불리는 세명의 89누나들이 일순위였고 그외에는 해당인이 없었다. 결국 영미누나가 회장이 됐고 승연이 누나가 부회장이 됐다. 여자회장이라니... 모두들 걱정이 많았다. 몇명의 노선배와 90학번 아이들이 차출되었다. 나도 그덕에 총무가 되었고 우리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해운대로 L.T를 떠났다. 지희누나,지영이누나,홍규형이 전직임원으로 동행을 해주었다. 서로의 호흡을 맞추고 목표를 하나로 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고 약해 보이는 임원단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L.T였다. 마지막 날 임원 모두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기차를 못탈 뻔한 것이 흠이지만 우리의 임원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번째 목표는 많은 신입생이였고 각자가 연락할 신입생들을 나누었었다. 종서내서 외박을 한 다음날 아침 나는 해곤(91, 정해곤, 93년도에 회장)이라는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부 O.T에 나올 것을 종용했다. 끝까지 듣던 해곤이의 말은 '떨어졌는데요.' 나는 순간 당황했고 후기를 칠것인지 조용히 물어 보았다. '재수할거예요.' 나는 큰 실수다하며 창피했지만 한달후 해곤이를 대학부에서 보게 되었다. 내말에 자극받아 후기를 받되나...

신입생 O.T가 있어 나와 성필이형과 선윤이 누나가 들어갔다. 그러나 O.T는 일대일 대응이었다. 단 세명의 신입생. 사회 교육관 3층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종현, 규영, 기열이가 전부였다. 당황했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입시후부터 자주 대학부를 드나들던 아이도 있었는데 영규하고만 다녔다. 뭐 저런애가 있나 했는데 키는 매우 커서 약간 올려다 보였다. 기분나쁘게.. 석기다.

드디어 신입생 환영회. 수는 생각보다 꽤 많아졌다. 그날은 유난히 한 애가 눈에 띄었는데 인상이 무서워 나는 가서 말을 걸지 못했다. 임원이지만. 성필이형이 가서 먼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요" 그 아이의 대답은 "배명!" 모두 황당해 했고 이후의 대답도 모두 같았다. 짤막한 반말 대답.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그를 모두 준면이라 불렀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었는데 그것은 그가 캠퍼스 코만도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말 "행동하는 양심"이 떠올랐다. 아무튼 석기, 준면 두 동기는 대학부에 새로운 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던 어느 목요 집회때 얼굴 넙적한 애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인상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자신없어 했었다. 하지만 대학부에는 항상 열심이였고 순박한 면이 많았다. 재웅이었다. 희영이도 있었는데 대학 붙기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무척 활발했고 대학부를 좋아했었다. 91년의 대학부에서 희영이의 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지용이도 있었는데 학교 문제로 고민이 많았고 결국 재수의 길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짧은 순간의 대학부 경험을 잊지 않았고 멋지게 성공해 주었다.

동계 수련회때다. 경기도의 어느 수련관이었는데 그때도 40명은 됐던 것 같다.

임원으로서 가장 크게 느껴졌던 행사였으나 분위기는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따스했던 동계수련회도 없었던것 같지만 너무나 전년도와 분위기가 틀렸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성필이 형의 말이 큰 위안이 됐었다. "원래 장소에 따라 많이 바뀌니까 걱정하지 마라. 잘하고 있어." 마지막 행사인 폐회예배. 그전에 목사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목사님의 기타와 노래가 있었다. 모두 분위기에 빠졌다. 그리고 돌아가며 한마디하는 시간에 영미누나 순서가 왔다. 갑자기 우는 영미누나. 무사히 마친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인줄 그때는 생각했으나 나중에 들으니 도저히 1년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의 눈물이었다 한다. 그때서야 나는 회장의 말 못할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1학기. 재수했던 동기들과 재웅,지용,희영이가 잘 나와주었고 기열,해곤,규영이도 재수하고 있던 친구들과 대학부사이에서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재웅이는 내 임원생활의 큰 의지가 되주었고 기열이와 해곤이는 분위기 메이커로 멋진 활력을 불어넣었고 여자 동기들의 총애를 받았었다. 그것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던 점이었다. 규영이 만큼 나를 믿어주던 후배도 없던 것 같고 희영이 만큼 대학부에 열심인 후배도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을 대하는 승연이 누나의 웃음과 낙천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거기에 그나마 무게를 실어준 윤정이 누나의 일관됨과 장석이형과 창기형의 놀라운 비판 정신은 대학부의 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임원회의때 눈물을 흘리며 교회의 부르조아적 성향과 허식에 대해 지친 감정을 보인 성희 누나의 담대함이 나의 심성을 자극했고 자영이 누나의 한없는 착함이 대학부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었다. 성경 공부는 요한 웨슬레가 지은 4복음서 해설집으로 했었는데 근 1년이 넘게 이책으로 계속했다. 매 복음서마다 제본을 했고 성경을 같이 읽어가며 발췌자가 책내용과 주요 부분들을 발표하고 그룹별로 토론을 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성경공부였는데 복음서의 내용이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하기에 좋기에 많은 좋은 의견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여름의 농활. 충주 부근이었고 떠나기 전의 사연도 많았지만 너무나 많은 대학부인들이 참여하였기(어찌보면 너무나 많은 부류)에 기억이 생생하다. 졸업한 기석이형과 87 88 형 누나들, 많은 신입생, 대학부에 잘나오지 않던 세철이형,남기,유라누나,종현이,장석이형,창기형 등등. 요즘은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선발 대장으로 미리 짐을 가져가던 날도 너무나 많은 일들이 꼬여갔지만(드라이아이스 가게 아저씨의 잠적, 재웅이의 갑작스런 헌혈, 메인 곤로의 고장, 각 공단의 동시 휴가 등) 떠나기전 영미누가가 건네준 쪽지 하나가 농활기간 내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충주까지 9시간. 고기사 아저씨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되서야 올 수 있었던 희영이와 재웅이에게도(버스에서 내내 서서왔다고 한다). 유난히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다. 농활 답사를 갔다 왔을 때다. 강변역에 준건이와 나 둘이 있었고 나는 유난히 풀이 죽어있었다. 그때의 준건이가 나를 웃기기 위해 했던 특유의 몸짓. 역 밖의 차들을 가리키며 스텔라!.. 스텔라!.. 스텔라!(물론 스텔라 차가 지나갈 때마다)를 외쳤다. 결국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준건이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 때는 중간 평가회가 끝난 밤. 평가회 때 목사님의 꾸지람이 있었다. 선배는 후배가 하는대로. 우리 후배 임원들의 기를 살려주기위해 하셨던 말씀이지만 선배들에게는 작은 아픔. 평가회 후에 임원회의가 있어 모두 모였지만 분위기는 무척 어색했다. 교장 교감인 윤경이 순미가 어느 한쪽에서 울고 있었다. 그쪽 목사님 숙소 옆이라 다 들릴 상황. 위로의 말과 '딴데서 울어야돼'라는 또다른 울림이 나의 현 위치를 슬프게 만들었었고 88누나들의 눈물도 여기저기, 임원누나들도.... 정말 나도 울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선배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으로 남자 숙소를 나와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가던 길에 지희누나가 갑자기 나에게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너 예배때 꼭 내 옆에 앉아!" 약간 겁도 났지만 지희누나 옆에 앉았고 예배를 시작했다. 찬송을 부르다 문득 그 자리의 특징을 발견했는데 따스한 담요가 알맞게 접혀 있었고 내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당시 나는 농활전에 허리를 다쳐서 몸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고 아침 마루바닥은 굉장히 차가웠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고개를 들수가 없었고 콧물까지 뚝뚝 마루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 앉은 유정이형은 아는듯 마는듯 "저게 눈물이야 콧물이야!". 이 모든 것이 대학부 사랑의 원천인것 같다. 너무나 넓은 지역을 커버하느라 2-3명이 한조가 되어 일을 나갔고 호별 방문 프로그램도 처음으로 해 보았으며 많은 종류의 일을 다양하게 해봤다. 마을 잔치때는 사람들이 하도 안모여서 영미누나와 일일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마을회관으로 오실것을 청했다. 조금 늦었지만 마을 잔치는 즐거웠다. 기열이 해곤이의 '아파트'와 흥에 겨워 춤사위를 가누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렇게 마지막 밤은 흘렀고 우리는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와 뒷 정리와 함께 마지막 여유를 즐겼다. 그날은 마당에서 별을 보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 밀짚 모자를 쓴 채 바라본 광화문 사거리의 정경이 아직도 선하다. 모든 것이 어색한 듯 사랑스럽다. 회식과 애프터. 그리고 10일 만에 돌아온 나의 집. 그리고 M.T를 갔다. 장흥. 그후 2학기. 대학부의 원은 다시 조그마해졌지만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희영이와 유정이 형, 그리고 영미 승연 누나가 고정 멤버였던것 같다. 우리동기들은 약간 소강 상태. 때론 힘들었지만 가끔씩 모여진 큰 원이 힘을 유지시켜 주었었다. 그리고 가을. 동기들이 준비하는 가을 M.T에 현임원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내저었으나 강촌에서의 가을 저녁은 무척 따스했다. 눈이 왔었고 벽난로의 불은 붉게 타고 있었다. 누나와 기차를 타고 후발대로 도착했고 영규가 준비한 인간 관계 프로그램이 무척이나 가을스러웠다. 그때는 모두가 이불을 쓴채 벽에 등을 기대어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 줬다. 다음날 아침에 좀 일찍 나왔고 승연이 누나에게 안녕의 눈빛을 보냈다. 그로부터 2개월, 나는 그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고 가장 생각이 많던 시절이었다. 매일매일 가스펠을 들었고 목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시선은 항상 교회쪽이었다. 술도 가장 많이 먹던 그때. 처음 1개월은 대학부와의 완전한 헤어짐. 어느 누구와의 만남도 없는 철저한 고독의 시간이었다. 준건이를 만나기 위해 교회주위를 서성이다 대학부인들을 보게 된것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고 결심은 깨어져 갔다. 대학부 소식만은 들었었는데 준건이가 회장이 되었다는 것과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지냈다는 것등.. 그러다 임원단 교체식때 한번 갔었는데 동기들로만 구성된 차기 임원단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고 나는 옥수수 얘기로 그들의 화합을 기원했다. 그러다 어느 목요집회때 정식으로 복귀했는데 그때의 회원들의 박수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약간의 쪽팔림과 즐거움....

92년의 시작이 밝아왔고 동기들을 따라 L.T를 갔다. 용인으로 기억되는데 약간의 추태를 보였던 것 같다. 그때 했던 말잇기 게임은 준건이가 무척 좋아 했었다. 그리고 또 한분의 출현. 강현식 전도사님. 무척 신선한 분이셨지만 대학부 분위기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기타를 배우며 친해질수 있었고 목사님과 강 전도사님의 2중 지도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동계수련회. 무척이나 많은 신입생. 그리고 선배. 동기. 역대로 가장 재미있었던 조별 장기자랑이었고 신입생들의 재능이 돋보였다. 장소는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답사를 석정이,태희,목사님과 같이 갔던걸로 기억된다. 운동 시간이 재밌었고 석기 발췌의 "신에게 솔직히"는 나에게 무척 큰 영감을 주었었다. 내게 무척이나 정신적 상처를 준 동계수련회이기도 했는데 .. 그 이유는 생략. 모든 임원이 힘들었고 마지막에 동기 사진을 찍었다. 내 책상 액자에 놓인 이 사진은 우리 동기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기억된다. 가는 차에서 준건이와 자리를 같이 했다. 무척이나 힘들어 하던 친구. 물론 나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내가 절망적이었기에...그리고 기억나는 건 규선이라는 귀여운 후배였는데 언니 얘기 때문이었는지 무척 호의적이었고 적극적이었다.

졸업생 환송회. 언제나 대학부의 겨울 방학 마지막 프로그램인 이날. 나뿐만아니라 우리동기들 모두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생각된다. 누나를 비롯한 88의 졸업. 대학부의 손실이기도 하려니와 대학부 신입생 시절 우리를 이끌던 각기 다른 개성의 88女 5인방과 이주형. 지금 생각해봐도 그러한 선배들을 다시 만나기는 힘들것 같다. 그리고 1학기. 유난히 신입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매주 2-3명의 새로운 인물이 대학부에 앉아 있었다. 거의 중간고사때까지 그랬는데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면 대학부의 원은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2-3주면 보이지 않는 그들. 그들을 이끌어줄 동기들의 힘이 필요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무척 아쉽다. 영미누나의 유학으로 4학년엔 승연이 누나가 거의 독보적. 매주 빠지지 않고 대학부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준면이와 욱래가 방위였고 또한 임원의 직책도 책임지고 있었다. 환상적인 멤버의 임원이었지만 조금은 삐거덕거리기도 했다. 지금 다시 한다면 어떨지? 춘계 M.T.(대성리 새터)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만들기 힘든 구성이기에 새롭다. 규영이에겐 마지막 M.T였던것으로 생각된다. 아침에 일찍 서울로 돌아올 때 동행한 두 여인이 있으니 규선이와 경희(얘가 경희인지는 거의 1년후에 알았다) 그리고 농활 준비. 이번엔 농활 준비 기도회 일주일 기간을 없애고 1박2일로 모든 세미나를 마치기로 했었다. 일영에 민박을 정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었다. 나는 조금 늦게 자영이누나와 갔었는데 굉장히 길을 헤맸었고 겨우 찾았을땐 저녁을 먹기 얼마전이었다. 일주일 분량의 세미나가 하루에 이루어져 많은 발췌자가 번갈아 가며 설명을 했다. 떠나기 전날 발표자끼리 리허설까지 했던 걸로 기억된다. 내용은 알찼으나 많은 임원동기들이 눈물을 찔끔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내용을 알아야 할 92 신입생이 1명인가 왔기 때문이다. 발표자가 곧 듣는 사람이었고 리허설까지 두번씩 들은 것이다. 임원들의 실망은 무척 컸으나 농활이 무사히 끝나기 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날밤 석정이, 윤경이, 석기와 밖의 오두막 같은 곳에서 밤새도록 얘기한 것이 기억에 새롭다. 여름밤이 무척 맑아 보였다. 그리고 농활이다. 나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장소는 1학년때의 그장소. 너무나 아름다웠던 그장소로. 많은 걱정과 근심으로 우리 동기들은 떠났다. 나는 남았다. 서울에. 그러나 안갈 수 없었고 후발대를 규합했다. 윤정이 누나와 성희누나는 원래 후발 주자. 재홍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갈수 있단다. 수진이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갈수 있단다. 상봉 터미날에서 만나기로 했다. 1시간이나 일찍와 기다린 재홍이. 가면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스칼렛 소설을 읽던 수진이(짜장면을 먹을 때도 읽었다). 가자 마자 근로복으로 갈아 입고 일을 나갔다. 비료주기였던 걸로 기억된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후배의 얼굴들이 기억된다. 처음 본 건 규선이. "할만하니?"..

마을은 조금이나마 변해있었다. 약간은 틀린 듯한 분위기. 사람들이 바뀌어서일까? 대학부 분위기도 바뀌었다. 크게 둘로 나눠짐을 느꼈다. 보수와 진보(?). 좋게 좋게 하자와 옛날의 향수가 뒤엉킨 듯한. 동기 남자와 동기 여자들의 분위기 차이 이기도 했고. 골수 후배와 X세대 후배의 분위기 차이 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기에 농활은 맛이 있다. 마지막 날의 평가회. 항상 말이 많고 밤 늦게까지 진행되는 평가회. 역시 말이 많았다. 우는 임원도 있었고 비장한 듯한 후배도 있었다. 물론 조는 회원도. 재웅이와 희영이의 분투가 기억난다. 다음날 나와 재웅이는 고기사 아저씨의 그레이스를 타고 남은 사람들을 뒤로 한채 교회를 나섰다. 손 흔드는 형제 자매들. 떠나기 전 규영이가 들으라며 테이프를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정말 20번도 더 들었다. 고기사 아저씨가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서울에 도착하니 비가 내렸다. 짐을 풀고 치워도 오지 않는 회원들. 상봉에 도착예정이었다. 같이 기다려준 많은 선배들. 이주형이 후라이드 치킨을 사줬었다. 늦게 도착한 회원들. 그날은 그냥 헤어졌던 것 같다. 너무 늦어서. 그렇게 농활은 끝났다. 항상 농활 후유증을 얘기한다. 역시 후유증이었나. 규영이도 그후론 볼수가 없었다. 희영이도 뜸해졌다. 여자 동기 임원들도. 2학기가 되서는 남자 대학부라는 말이 유행했다. 위안이 된다면 92 신입생들 몇명이 열심히 나오기 시작한 것. 여름의 L.T때는 새벽1시에 교회로 찾아갔었는데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했다. 광화문 24시간에서 먹을 것을 사서 먹었고 배재 공원에서 많은 얘기를 했었다. 2학기의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으로 했다. 각장을 매주 돌아가며 발췌하고 토론했다. 대학부실에서 했었고 남자대학부의 전성기였다. 여자는 승연이누나가 고정 멤버에 선아가 가끔씩 나왔다. 가을의 정동 젊은이 체육대회 애프터때 덕수궁 뒷길 언덕을 넘어 위위로 향하던 멤버는 나,준건,준면,석기,욱래,태희 그리고 남자 후배 2명, 정말 무서웠던 남자 대학부 였다. 추석때쯤에 재웅이가 현역으로 군대룰 갔었다. 환송회때 모인 사람은 나,준면,욱래,종서,해곤,기열이. 기열이네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던 것과 재웅이 한많던 노래 "별이 진다네". 정말 구슬픈 노래였다. 2학기 말의 목요집회는 어찌보면 힘빠진 대학부를 하지만 저력의 대학부를 보여줬다. 임원이 한사람도 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후배들이 잘메꾸어 주었다. 해곤이. 기열이. 규선이의 힘이 컸다. 그때는 남사당이라는 곳을 자주 갔었는데 이글을 쓰다 보니 그곳의 아주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몇년동안 가보지를 못한 것 같다. 그렇게 가까운데도.

91년도 나의 임원때 거른 적이 있는 Home Coming Day도 멋지게 재기하였는데 각 학년 모두 멋진 작품들을 내 놓았지만 단연 압권은 우리동기들이 만든 Beauty and the Beast 비디오 였다. 준면이가 카메라맨이었고 나는 개스통, beauty는 남기, beast는 '미녀와 야수' 동화책의 야수 얼굴을 여러번 확대 복사한후 석기가 색을 입힌것인데 가면을 썼을때는 석기가, 가면을 벗은 왕자는 준석이가 맡았다. 이밖에 각본 준석, narrator 준건, 시계 등 다수 태희, 동네 여자 석정, 윤경, 미녀 아비 욱래, 효과음 나. 끝에 N.G 모음까지 넣은 이 비디오는 정말 엄청난 히트를 했었다. 준석이와 남기(왕자와 미녀)의 키스신은 엄청나게 많은 N.G를 냈었는데 바로 직전에 애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 것. 그리고 졸업생 환송회. 승연이 누나, 윤정이 누나가 졸업했다. 동기모두가 아쉬워하던 날이었다. 승연이누나가 눈물을 짜 냈었다. 그렇게 2학기가 지나가고 총회의 날이 다가왔다. 인항홀에서 있었던 총회에서 회장후보는 기열이와 해곤이. 모두 당당히 나서줬고 기열이는 ROTC 문제로 사실상 기권한 것이 되어 해곤이가 회장이 됐다. 부회장(서기)에 선아. 어울려 보이는 회장 부회장이었다. 임원은 총무에 지용이, 신앙부장 기열이, 지성부장 경희, 활동부장 재홍이, 회계 희영이. 재홍이와 희영이는 거의 안나왔던 걸로 기억되고 경희가 예상외로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경희는 사실상 대학부에 신입생 같은 존재였지만 굉장히 열심히였고 해곤이는 뛰어난 재치와 순발력으로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기열이는 대학부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지용이는 특유의 성실함을 잃지 않았다. 선아는 늦지만 않았다면 무척 좋은 부회장이 될뻔했다. 같은 동기들이였던 수경이, 진완이, 호진이, 재도, 희정이, 규영이의 힘이 보탬이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상황이 어쩔수 없었다. L.T로 천안의 해곤이 아버님 숙소로 갔었는데 선배로는 나와 준건이, 태희가 갔었다. 2박 3일이였는데 2틀밤을 내리새며 얘기를 했던걸로 기억된다. 나와 준건이는 마지막날 전날밤 무궁화 막차를 타고 왔었는데 밤새도록 그들과 나눈 토론이 인상적이었다. 농활을 안가기로 결정했었는데 가자던 선아를 설득하느라 다른 모든 사람이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그리고 93년을 맞이했다. 많은 93학번이 들어왔다. 정말 많아 보였다. 왕자였던 해광이를 빼면 거의 여후배들이였다. 제일 먼저 친해진 후배는 영지. 동계수련회에서 많은 얘기를 했었다. 거의 몰려다니기만 한 93들. 92의 남후배들과 친한 것이 우선 다행이었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고민도 많아 보였다. 왠지모를 아슬아슬함이 있었으나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았다. 4학년 1학기였는데 우리동기들은 이시기에 사실 거의 나오지 않았다. 여자동기는 더더욱 그랬고.

이때의 두두러진 변화는 우선 동계수련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전년도의 반으로 준 것이고 목요집회 끝나는 시간이 8시로 1시간 정도 당겨진 것. 한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힘든 것. 역시 그후로 이 인원, 이 시간은 조금씩 줄어만 갔다. 물론 임원들의 탓은 아니리라. 시대의 흐름이랄까..............

이때부터는 92학번이 대학부라는 곳을 자신의 터로 조금은 인식한 때가 아닌가 싶다. 동하가 무척 열심이였고 준호도 열심이였다. 철수란 아이도 들어왔다. 이때쯤이야 말로 1,2,3,4학년이 골고루 잘 나오던 땐 것 같다. 이때는 또한 목사님이 대학부에서 손을 조금씩 빼기 시작하셨고 강현식 전도사님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신 때이기도 하다. 대학원 시험 공부로 무척 바쁜체 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대학부는 열심히 나갔다. 하지만 1학기때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는 것은 무슨 일일까? 누나가 결혼을 한 때였고 함이 들어오는날 춘계 M.T를 가는 바람에 무척이나 늦게 (밤12시쯤) 석기랑 준면이랑 갔었다는 기억뿐.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기타가 없었던 M.T였다는 것도 기억난다. 조금은 김빠진 M.T였었다. 임원들의 낙심도 꽤 컸으리라 생각된다. 여름엔 농활대신 설악산을 올라갔었다. 나는 대학원 공부를 이유로 가지 못했다. 남다른 임원들의 준비로 간 설악산. 여자 후배들이 걱정이 됐지만 모두들 무사히 돌아왔다. 속초행 비행기로 혼자 후발대로 간 욱래가 부럽기도 했었다. 가는날은 배웅을, 오는날은 마중을 하러 교회에 갔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운지... 이 여름방학이 의미있다면 93후배들과 우리동기들이 무척이나 친해진 것.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 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귀여운 93탓이리라... 신입생 환영회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모두를 놀라게 했던 영은이, 어린애 같던 영지,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던 자경이, 놀라울정도로 어른스러웠던 선진이, 애교덩어리 진현이, 화끈하고 뭔가가 틀렸던(무게) 진아, 진짜 왕자 해광이 등등이 인상에 남는다.

여름의 L.T는 교회에서 했었는데 석기와 내가 참여했었다. 대학부실에서 했었는데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임원들은 반 밖에 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새벽쯤 유아부실에서 잠시 잤고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고 집으로 왔었다. 그리고 2학기. 대학원 공부의 피크. 하지만 대학부를 안나기는 역시 불가능. 가장 후회되던 한학기 이기도 했고 가장 고민도 많이 생겼던 이시기. 친했던 93과 조금씩 멀어짐을 느낄때 진아와 우희가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우희를 대학부에 붙들어 두기 위해 매일매일 찾아가고 저녁먹고 산책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정말 이렇게 우희가 대학부를 좋아해줄지 몰랐다. 가끔씩 점심 사달라고 찾아오던 규선이도 힘든 공부의 청량제 구실을 해주었다. 이때는 무척이나 부원을 많이 갔던 때인 것 같다. 거의 매주 같은 장소였고 항상 그 멤버 그대로 였다. 동하와 정훈이가 항상 그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든든했다. 추계 M.T는 강촌으로 갔었다. 정확히 2년만에. 후발대가 굉장히 많았었고 덕분에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밤에 오두막에서 떡복이를 해 먹었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무척 인상적인 M.T였다. 올때는 진아와 이승환의 새로운 앨범 덩크슛을 엄청 들은 것 같다. 2학기 말쯤에는 해곤이가 군대를 가게 되었고 환송회가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아쉬워하는 후배들. 동하도 미국으로 떠났다. Home Coming Day때 보여준 93의 저력은 굉장했다. 준비기간에 있었던 기열이 생일 파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밤늦게까지 사회 교육관에서 준비를 했었는데 각 층마다 93,92,91이 모여 준비를 했었다. 92의 연극도 무척 멋있었는데 92가 한번 모이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 준비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뿌듯했다. 항상 이런 행사를 치를때면 나타나는 대학부의 힘은 놀라왔고 그 단결력이 평소에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 또한 바램이다.

드디어 총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많은 92학번이 있었으나 그들도 나름대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총회전에는 준호와 규선이가 유력했으나 규선인 오지 않았다. 또 한명의 닥호스 수진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시켜만 준다면 열심히 하겠다는 힘찬 말에 많은 사람이 표를 던져주었다. 준호와 수진. 새롭게 선출된 임원들. 그들앞에 신의 은총을.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는 은진이네 집에서. 대학원 시험에 가까스로 붙은 나는 겨울 방학때도 계속 학교 연구실을 나가야 했고 신입생으로서의 온갖 설움을 받았다. 대학부도 한때를 만났다. L.T 보고와 신입생 환영회. 한명도 오지 않은 신입생 환영회가 모두를 아연케 했다. 동계수련회때는 지용이 차를 타고 늦게 가게 되었는데 원은 더 좁은 상태.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인 임원들과 93 후배들. 신입생이 없던 것이 아쉬웠다. 밤에 추적놀이를 했었는데 무서웠지만 조원들의 단합에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의 사진 한방과 함께. 졸업을 몇주 앞둔 나를 위한 후배들의 배려가 눈물겨웠다. 그리고 졸업생 환송회. 많은 동기와 더불어 졸업했다. 성희 누나도 함께. 생각보다 그렇게 감정적이 못했고 눈물도 안 나왔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졸업식. 감회가 새로왔고 많은 사람이 와주었다. 태희랑 같이 했었는데 원없이 사주고 싶었고 원없이 정리하고 싶었다. 그날은 지용이네서 잤던 걸로 기억된다. 착한 지용이. 그리고는 졸업이다. 학교 생활에 열중인 나, 바쁜 생활이 있었지만 대학부 시절의 생활 모습은 변화가 없었다. 너무나 바빠보이는 선배들. 동기들. 대학부를 생각하는 동기들의 모습은 이때에도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발을 떼려고 노력하던 2-3개월의 노력을 포기하고 편안하게 대학부 집회에 참여했다. M.T도, 목요 성경 공부도, 일요 집회도. 후배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함께 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였다. 유일한 신입생이었던 형렬이의 재수로 텅빈 94학번의 자리가 컸지만 92학번의 대학부에 대한 매진이 기특했고 그런 오빠들에게 힘을 주었던 93 후배들과 해광이... 철수가 특유의 유모로 분위기를 잘 이끌었고 준호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임원을 맡고 나자 놀랍게 대학부인으로 변신한 우희, 항상 없는 듯 있는 듯한 수진이, 썰렁함의 대를 이었다고 공인 받은 대근이와 ROTC의 어려움속에서 기타를 두들겨준 정훈이, 새롭게 대학부의 자리에 들어선 듯한 수경이와 영기 그리고 민용이(영화 보기 파트너), 선배들의 총애 속에 가장 열심인 대학부의 한때를 지낸 규선이 등등. 새로운 대학부의 변화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매달 첫주에 젊은이 공동 예배가 있었고 미려가 바이올린을, 규선이가 첼로를 연주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대근이가 방위를 갔고 철수도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내 생일날 준호가 선물해준 강산애의 테이프가 생각나는데 그날은 준호가 많이도 울었었다. 그리고 여름의 행사는 농활이었다. 1년만의 재개. 많은 선배들이 반대했지만 임원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실로 어려운 조건. 경험있는 후배들이 없었고 임원들도 부족했고 신입생도 없었다. 하지만 떠났다. 동기중엔 욱래, 준면, 준건이가 갔다. 방학이 없은 대학원 생활이 원망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서울로 오는 날 마중을 나갔다. 늦게 왔는데 위위에 있었다. 그나마 준호,해광,규선이는 오지도 않은 상태였고 몇명은 집에 간 상태. 조금은 쓸쓸하고 황량한 애프터였다. 예전하고 어딘가 다르게 산란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농활이었으리라. 그날밤 늦게까지 배재공원에서 얘기를 나눴고 나는 수경이와 준면이를 차로 데려다 주었다. 준면이 집앞에서도 늦게까지 얘기를 나눴다. 수고했다. 준면아........

그맘때쯤 지용이가 군대를 갔다. 아픔도 사연도 많은 상태. 괴로워하는 지용이가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잘 지내는 것 같아 기쁘다. 환송회때의 일 또한 기억되리라.

2학기는 좀 한산했다. 93학번이 잘 안나왔고 임원도 적었다. 내 기억에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다. 준호 동기 여자애들이 잘 나와주었던 것 같은 데 11월에 군대가는 준호에 대한 우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서강대에서 거의 매일 치던 테니스도 기억에 새롭다. 가을에 Home Coming Day가 있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93이 모여 슬라이드를 만들었었고 작품도 무척 재미있었다. 92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무척 감명깊은 작품이었다. 졸업한 선배로서 처음 간 H.C.D라 감회가 새로웠다. 재웅이가 휴가차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게 가을이 흘러갔다. 그리고 금새 총회가 다가왔다. 정말 긴 시간의 총회였고 말도 많았다. 당시의 비장함이 이제는 없지만 허무하게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회장에 해광이, 부회장에 영은이가 뽑혔다. 또한 새로운 임원들도. 그 이후로 잘 보이지 않는 몇명의 후배가 있었고 준호도 군대를 갔다. 재웅이도 편집부장이 되었고 형렬이가 총무가 되었다. 새로운 임원단은 정말 새로웠다. 특히 나에게도. 조금은 멀게도 느껴지고...

재웅이네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냈다. 신입생 미나를 처음 보았다. 졸업생 환송회서 처음으로 후배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기열이, 희영이, 지은이. 그리고 동계 수련회.. 10명정도 밖에 안되는 인원이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종도 였는데 아침 일찍 재웅이와 갔었다. 흑백사진이 새롭다. 그리고 춘계 M.T도 갔었는데 꽤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더이상은 내가 설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여름. 작은 십자가 일로 대학부에 마지막 정성을 쏟았지만 조금은 가물해져 가는 나의 미력을 느꼈다. 지리산을 가기 위한 준비와 길고긴 여정. 재웅이가 그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임시 총회도 있었는데 형렬이가 2학기의 회장이 되었다. 총회때 8명의 남자 동기가 모였다. 사적으로 모이기 힘든 것이 동기지만 대학부의 일로는 만나기 쉬운 것이 우리 동기들. 대학부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후배와 대학부의 부름에 항상 대기 상태인 듯한 우리의 동기들. 욱래는 다다음날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진아가 미국으로, 규영이도 미국으로..... 2학기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논문을 쓰느라 바빴고 왠지 시들함을 느꼈다. 10월말에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대학부인들이 찾아주고 도와주어 정말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응급실의 화장실에서 나를 부축하느라 힘 뺏을 준면이 석기.. 밥 못 먹는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느라 수고했었다. 매일 찾아온 태희가 고맙고 혼자 찾아오는 모험을 강행(?). "애인이냐?"라는 질문공세를 받게 만든 유라누나, 현아누나, 수진이가 큰 위안을 주었다. 병원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게된 해광이가 다시 한 번 그립게 느껴진다.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퇴원할 때 발생한 아버님의 교통사고가 겨울을 좀더 겨울처럼 만들어서 일까 대학부에서의 시간이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총회가 있었고 형렬이가 재선되었다. 은혜라는 아이가 부회장이 되었는데 나이 어린 회장을 잘 보필할수 있을지.. 형렬이네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고 의미있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대학부도 변화해야 할 때. 청년1부의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 해곤이가 제대를 했고 대성리로 L.T를 다녀왔다. 새로운 임원들에게 힘과 희망을 가득주고 싶다.

이렇게 해서 나의 글을 마친다. 쓰면 쓸수록 힘들어 지는 것이 글쓰는 힘이고 추억과 회상에 잠기는 것도 분위기를 필요로 하기에 갈수록 옹색해져가는 글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 개인적인 글이 되버린 것 같기에 아쉽고 좀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싶지만 시간과 능력이 허락치 않기에 미안함을 느낀다. 옛날부터 지난 대학부 생활을 정리하고 싶었고 대학부의 많은 것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 같아 무척 기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지난 대학부의 분위기가 어땠고 어떤 사람, 어떤 힘에 의해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는가를 후배들이 느껴만 주기를 바랄 뿐이며 너무나 많은 부분, 많은 요소, 근원적 힘, 사회 분위기를 그냥 넘어 갔기에 무척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부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 선배님들, 대학부에서의 6년 동안 큰 의지와 배움을 준 동기들, 부족한 선배에게 끊임없는 믿음과 사랑을 준 후배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J의 사랑학 - 121호 십자가 中 
정준면 (91) 

내게는 잊혀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고독이 깊은 날에 외로움으로 가슴 아파 눈물 흘릴때, 문득 문득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을 갖게 해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며 한숨 짓게 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게 젊음의 아픈 가슴을 갖게 해준 두사람이었습니다. 

먼 발치서 그냥 모습만 바라볼 수 있어도 좋았고 어쩌다 가까이서 마주치면 

가슴저린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태연으로 가장하려 해도 괜히 떨리고 목소리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게하는 그런 

두사람이었습니다. 

잠시의 미소로도 모든 고통을 잊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리고 미숙했기에 미쳐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남으로 멀어졌지만 지금이라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픔을 느끼게 

하는 두 사람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들을 생각합니다 

하나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기다림의 아픔속에서 상처 받은 내모습을 보며, 젊음의 아픔이란 세월만이 치료약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그리워하며 아파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에게는 아픔을 가르쳐준 두사람이 있었습니다.

 
 

▶ 특집 Ⅰ : 정동대학부 20年

훗날에 아름다운 대학부
박수미 (87)

작은 십자가

십자가 앞에 왜 '작은'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는지를 내심 궁금해하면서 올해 들어 계속해서 작은 십자가를 받아 보고 있다.

한동안 대학부와의 연결 끈이 없다가 매달 정기 구독하는(?) 작은 십자가가 내게 큰 기쁨을 준다. 내 손에 배달 되어지는 바로 그 순간 하던 일을 뒤로 하고 한 번에 주욱 읽어 내려간다. "정동 대학부" 이제는 이름만으로도 그리움을 느낀다.

가끔 정동에 들릴때면 빼꼼이 대학부실을 열어 본다.

참 많이 변했구나! 순간 나의 대학부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풍기는 겉모습부터가 우리 때하고는 참 많이 다르다.

대학부실의 멋진 탈바꿈 - 깨끗하고, 산뜻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작은 십자가의 세련된 변화 - 깨끗이 컴퓨터로 활자화되어 말쑥하게 편집된 것이 참 신선하다. 우리 땐 일일이 수작업으로 낑낑대며 만들어 냈건만.........

옛날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때의 일들의 기억이 새롭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토록 그립고, 정다웁고, 좋기만 하건만 왜 그때에는 정동의 대학부가 그리도 부담스럽고, 밋밋하고, 패기와 열의도 없어 보였는지.

그땐 별루(!)였던 대학부가 지금에 와서 이리도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별난 느낌은 아니리라. 우리 대학부는 바로 이런 맛이 있는 곳이다. 우리 후배들이 이런 대학부의 맛을 좀 더 일찍 맛보기를 바랄 뿐이다.

여러분들이 느끼는 지금의 대학부는 어떠한지?

자신에게 곡 걸맞는 곳이 아닌 것 같기에 혹 자신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삶의 고민이 만족스럽게 해결되고 나눌 사람이 없기에 다른 곳을 찾으려 하고는 있지 않은지?

누구나 대학부원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으리라. 나도 이런 질문에 힘들어 했고 이러할 때에 힘이 되주었던 선배님들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대학부에서의 나의 자리를 확인하였고, 지금에 있어서 대학부가 내게 대학 4년동안의 생활을 올바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해준 곳임을 새삼 깨닫는다.

20-30명 안팎의 많지 않은 수가 모여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학부의 여러 행사를 치루었다. 대학부에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참 많다. 행사 준비에 쫓기고, 바쁘게 행사를 치르고, 그리고 나면 꼭 있는 평가회!

대학부 행사의 꽃(!)이었던 농활을 힘들게 다녀와서 평가회를 하다보면은 우리의 부족하고 미숙한 점은 왜 이리도 많은지, 내년에 또 가야 하는지 마는지, 남는 것은 허탈감뿐이다.

그러나 훗날인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면, 서로의 수고로움가 재미난 일들을 생각하며 서로 웃음 짓는다. 그 때의 힘들고, 성에 차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고 있다.

농활을 대신한 멋진 여름 Program 인 듯한 여정1,2는 잘 다녀왔는지?

여정1,2를 잠시 소개한 글을 보고 참으로 근사한, 그리고 여러분들다움이 가득한 참신함과 신선함이 가득 전해 왔다.

훗날 이 일들이 여러분들 기억 속에 두고두고 기쁨을 가져다주리라!

나에게 바라는 "대학부 선배나 전도사의 입장에서 요즘의 대학생들에게 바라는 이야기나 대학부 후배들에게 바란다"라는 거창한 편집의도와는 다르게 정동 대학부를 생각하면 항상 내 心속에 가득 차 맴돌던 이야기의 한 모퉁이를 이곳에 내어 보인다.

예전의 선배들이 대학부를 졸업하고 가끔 "선배의 자리"에 초대되어 오면 늘상 하던 "여러분들은 지금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학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될 거예요"라는 말이 지금 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대학부가 좋은곳인지를 훗날인 오늘에서야 깨달았지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대학부의 주인이었을 때에 이를 알고 대학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후배들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그때의 대학부가 좋았듯이 여러분들의 지금의 대학부가 좋기를 바랄 뿐이다.